안수산* Susan Ahn Cuddy 역사속으로


Be a good American citizen... but don't forget your heritage.

From LA to DC and Back

Susan Ahn Cuddy was born in 1915 in Los Angeles, California as the eldest daughter of Dosan Chang Ho and Helen Ahn. Her parents were the first Korean married couple to immigrate to the United States in 1902. All of the Ahn Children were born in California. Her father told his children to: 밆o your best to be good American citizens but never forget your Korean heritage.� As the family established themselves, the Ahn house became a haven for many Korean immigrants. The Young Korean Academy (Hung Sa Dan) made its headquarters at the Ahn′s residence as a resource center for many Korean immigrants. Many exiled Korean patriots, including Soh Chae Pil, the first Korean American citizen, visited the Ahns while they lived at 106 North Figuero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The Ahn family also lived at a house on 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campus and today it serves as the Korean Studies Institute.


Even today, Mrs. Cuddy's accomplishments are considered remarkable and are, indeed, unparalleled. During her youth Susan Ahn Cuddy worked for many of Dosan′s Independence organizations in Los Angeles. She enjoyed and participated in sports such as baseball and field hockey. Susan graduated from San Diego State University in 1940 and joined the United States Navy in 1942 serving until 1946. She felt joining the Navy was a way to help free Korea from the harsh Japanese Colonial Era rule and was eager to join the Navy to fight the Japanese. Susan first worked as a Link Trainer and became the first woman Gunnery Officer training US Naval pilots. Susan Ahn Cuddy eventually became a Lieutenant and went on to work for US Navy Intelligence, the Library of Congress and The National Security Agency in Washington D.C. During the Cold War, she was in charge of a section of over 300 people working in the Russia section. She received a Fellowship from the National Security Agency to study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in 1956. Afterwards, Susan worked on many top secret projects for the Department of Defense and other agencies during her service with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until 1959.


In April 1947 Susan married Chief Petty Officer Francis X. Cuddy an American Irishman (deceased in 1994) who also worked for Navy Intelligence and NSA. He was a code-breaker and helped the United States free Korea through his specialty work since he spoke Japanese fluently. After his Navy career he worked for Kodak and GAF in film processing sales. He helped finance the Ahn family′s Moongate restaurant business.

In 1959 Susan Ahn Cuddy came home to Los Angeles and joined the Ahn family in managing the famous Phil Ahn′s Moongate Restaurant in Panorama City until 1990. In 2003, the State Assembly of California of District 28 named Mrs. Cuddy the Woman of the Year in honor of her commitment to public service. On October 5th, 2006 she received the American Courage Award from the Asian American Justice Center in Washington D.C.


Mrs. Cuddy, as well as the Ahn family, is one of many Korean American pioneers who are influential and inspiring to many of today′s youth and community leaders. Mrs. Cuddy is recognized and honored today for her commitment to the Asian American community, being a good American and as the pioneer she truly is.





FROM e-budo.com:


Does that Navy officer look Asian to you? If so, then she could be Susan Ahn Cuddy, sister of actor Philip Ahn. She graduated from San Diego State, and joined the Navy in December 1942, age 27. Ms. Ahn (she was still single then; not many eligible Korean men in Southern California in 1942) was rejected from OCS at first (race), but was allowed to enlist and subsequently sent to Navy OCS at Smith College in Massachusetts. She was originally part of the LINK Trainer program in Georgia, and then an aerial gunnery instructor at Okalaka, Florida. (The first female gunnery officer in the USN, actually; she trained at Pensacola and then assigned to Atlantic City Naval Air Station.) She came out of WWII a 2-stripe lieutenant, assigned to what would today be NSA, where she continued working as a civilian after the war. (Her graduate work done in the 1950s was on a place called Vietnam.)

BTW, Mrs. Cuddy says the way to get your relatives to accept your mixed-race marriage is to have kids.

Source: "A Conversation with Susan Cuddy," "Occasional Papers," a publication of the Korean American Historical Society, Vol. 4, 1998-99; URL: http://www.kah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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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조선인(朝鮮人) 雜文




박인수
[ 박인수 박사 / 재뉴 칼럼니스트, 오클랜드중국문화원 원장 ]

승인 2012.09.27


일본육군 내 최고 계급에 올랐던 조선인........ 홍사익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에게 탈환된 필리핀 바기오 섬에서 체포된 후 교수형으로 일생을 마감한 한 조선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홍사익(洪思翊, 1889-1946.9.26), 일본어 발음은 ‘고시요꾸’(영어로 Shiyoku Kou)이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일본군내 최고의 계급인 육군 중장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필리핀 마닐라 국제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을 때까지 한마디도 자기변호를 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고, 죽은 후에 야스쿠니(靖國=정국) 신사에 합사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본식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홍사익이 태어난 고향은 경기도 안성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고향에서 한학을 배울 때 사서삼경을 모두 외었다고 한다. 구한말 나라의 국운이 막바지로 접어든 1909년, 그는 20세의 나이에 영친왕과 함께 조선황실에서 보내는 일본 사관학교 유학생에 영친왕의 동반자로 선발되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정미(丁未) 조약 이후 일본에 의해 군대를 해산당한 조선에서는 장래에 대비하기 위하여 한두 명씩 인재를 선발하여 국비유학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보냈다. 여기에는 후일 중국 각지와 연해주에서 일본과의 무력투쟁의 선구자적인 일익을 담당한 노백린(盧伯麟), 유동열(柳東悅), 이청천(李靑天), 이갑(李甲), 김광서(金光瑞, 변명으로 金擎天=김경천 *이 분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백마를 타고 활약한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라는 유력한 설이 있음. 임시정부 독립군 사령관 지대형(池大亨)이 ‘이청천’으로 변성명할 때 함께 ‘하늘 천’자 돌림으로 ‘김경천’으로 바꿨다는 설-필자 주) 같은 이들이었다. 모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사지식을 익힌 뒤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분들이었다.

이 분들과 달리 홍사익은 대표적 친일파 명단에 이름이 오른 사람이다. 그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소수의 선발된 인재들만 모아 별도로 치르는 시험을 쳐서 뽑는 일본 육군대학 입학시험에서 당당히 발군의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키도 크고 인물도 잘 생긴데다가 머리도 총명하고 입도 무거워 일본인 상관들의 호감을 많이 받았다고 전한다. 조선인으로서 육군대학에 다닌 사람은 영친왕 이은(李垠)과 영친왕의 두 조카인 이건과 이우, 그리고 홍사익 모두 4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중 이우(李鍝)는 일본 육군 중령으로 근무 중 1945년 8월7일 아침 승마로 출근하던 도중 히로시마 원자탄 폭격으로 사망하여 8월 14일 유해가 조선으로 운송되어 국장을 치렀다.

홍사익은 지휘관으로 임관할 때마다 “나는 조선인이다. 지금부터 천황폐하의 명령에 의하여 지휘권을 갖는다. 이의가 있거나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나오라.” 라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일본군 내에서 승승장구한 그는 만주의 관동군 지휘관으로 배속되어 근무하다가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중국을 떠나 필리핀 전지로 이동되어 거기서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있다가 패전을 맞았다. 남방전선으로 떠나기 직전 동경을 방문한 매일신보 기자 김을한(金乙漢)씨가 그에게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였다. 그는 “내가 탈출하지 않는 것은 일본군에 대한 의리만도 아니라 나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수십만의 조선인 징병 징용 노무자들이 당할 희생을 염려한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하였다.(신동아, 1984. 8월호)

여기까지만 보면 홍사익은 에누리 없는 골수 친일파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가 사형을 언도받자,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독립운동 주도 민족지도자 180여명이 연대 서명으로 연합군사령부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그는 일본군내 최고 수뇌부에서 나오는 정보를 빼내 극비리에 주기적으로 충칭(重慶=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던 것이다. 일본 육사출신 중위로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군 사령관을 하던 이청천 장군과 극비 연락선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국내에서 항일단체인 건국동맹을 이끌던 여운형(呂運亨)은 비밀리에 사람(朴承煥)을 보내 그와 접촉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최고 계급에 오른 조선족 장군........ 조남기

6.25 동란 발발 후 5개월의 시간이 흐른 1950년 11월 26일,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부가 위치한 북한의 평안도 대유동(大楡洞) 동굴(일제시대의 폐 금광)이 미군 정찰기에 의해 발각되었고 곧이어 폭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의 작전참모로 참전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모안영)은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지 한 달 만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바로 그때 마오안잉의 동지로서 조선족 작전참모로 참전한 이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조남기(趙南起=중국어 발음 자오난치)이다.

내가 조남기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994년 겨울방학 기간 약 한 달간 ‘연변 조선족 대학생들의 의식조사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 수집 차 연길을 방문하였을 때이다. 한국정부 학술연구재단의 지원으로 비밀리에 현지(연변대학교 재학생 대상) 설문조사를 위하여 우리 일행 3인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 연길시(延吉市)의 한 호텔에 들었다. 숙소로 정한 그 호텔은 당시로서는 연길에서 최고급이었고, 건물외부 정면 상단에 ‘8.1호텔 조남기’란 글자가 크게 동판으로 새겨져 박혀 있었다. 넘버 8.1은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 건군 기념일이다.

조남기가 누구일까? 중국현대사 인물탐구 벽(癖)이 또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조남기의 고향은 충청북도 청원으로, 집안은 풍양(豊壤) 조씨 가문의 명문가 후손이다. 1927년 4월 20일생이고, 그가 11살 나던 해인 1938년에 할아버지 조동식(趙東植)은 조선을 강탈한 왜놈들의 학정을 피해 가솔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길림성 영길현(永吉縣)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고 한다.

그는 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의식 학습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면서 동북의용군에 가입하고 무장활동을 시작하였다. 1946년에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에 입학하여 공산주의자로 확고하게 신념을 굳히고 활약하면서 당시 그 지역의 국민당 세력을 축출한 후 토지개혁을 단행하는데 헌신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7년 2월에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 해는 공산당이 동북지역을 석권하여 2년 후 다가올 전 중국 공산화의 서막을 연 해이기도 하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조남기는 조선족 간부 제1기로 참전하게 되었다. 마오안잉과 함께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부 작전참모로 펑더화이를 보좌하였다. 당시 여러 명 참모들 중에서 펑더화이는 조선족인 조남기의 의견을 매우 중시하였다고 한다. 펑더화이의 참모였던 관계 때문에 조남기는 나중에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정치적 불운을 맞이하게 된다.

휴전으로 전쟁이 멈추고도 그는 2년 더 북한에 머물다 1955년에 중국으로 돌아가 길림성 군구(軍區) 정치부 주임으로 활약하였다. 1966년에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였고 4인방의 지도하에 전국적으로 홍위병이 미쳐 날뛰는 무법천지 세상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5천만이 굶어 죽은 대약진 운동 실패 후 열린 1959년 여름의 여산회의(廬山會議)에서 펑더화이는 무장(武將) 답게 마오쩌둥의 실정을 직언하였다.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7천 명 당 고위간부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도록 궁지로 몰았던 펑더화이가 7년이 지난 후 문화대혁명의 회오리 속에 정치생명이 끝났다. 베이징 청화대학 재학생으로 구성된 홍위병에 의해 돼지처럼 묶여 끌려온 펑더화이는 감옥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그리고 조남기도 펑더화이 계파로 연루되어 일체 직무 정지되고 숱한 좌절을 겪게 되었다.

조남기는 1973년에 복권되어 다시 길림성 군구 정치위원으로 돌아왔다. 마오쩌둥의 시대가 끝나고 개혁개방의 시대를 연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통치기간인 1980년대 중반에 그는 인민해방군 최고계급인 상장(上將)에 승진하여 조선족으로서는 군 최고의 직급에 올랐다. 1992년에는 총후근부 주임(總後勤部主任, 군수사령관)과 군사과학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현역에서 퇴임한 후, 1998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약칭 정협) 부주석(국회 부의장에 해당)을 역임하였다.

조남기는 2000년 4월에 대한민국 국회(국회의장 이만섭)의 초청으로 방문단을 이끌고 70이 넘은 나이에 62년 만에 그가 태어난 고향을 방문하였다. 고향 청원에서는 그를 위한 환영회를 성대하게 벌였다. 조남기는 선물로 가져온 마오타이 술(茅台酒)을 고향 친지 어른들과 나누면서 어린 시절을 회고하였다. 남한출신으로서 동족상잔의 6.25 전쟁 때는 북한 편을 들었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고위 원로인 그가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남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홍사익과 조남기........... 두 조선인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이 우리에게 시사(示唆) 하는 점은 많을 것이다. 까불대던 당시 구한말 나라의 시운(時運)이 그들을 그렇게 내 몰 수밖에 없었던가! 대한민국은 이들 두 조선인이 걸어 간 생애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나는 주관적 견해를 말하고 싶지 않다. 칼럼을 읽는 독자 제현들께서 깊은 생각으로 판단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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