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포군관학교 조선혁명가들 역사속으로


불멸의 발자취 시리즈






불멸의 발자취(9)--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1-08-10 13:55:58 ] 클릭: [ ]


광주시 황포구 장주도에 위치한 황포군관학교는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있다. 사람들은 복원된 교실, 기숙사, 사무실, 식당들을 돌아보면서 감회를 금치 못하였다. 바로 이처럼 간소한 학교에서 20여년간 중국혁명을 주름잡았던 수많은 장성급 인물들이 배출되여 나왔던것이다.


앞줄 건물 2층에는 총리사무실과 교장실, 비서실이 있었고 부근에는 학교 각 부서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실벽에는 황포군관학교 1기생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편액이 걸려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조선혁명가들은 황포군관학교 제3기부터 입교하기 시작하였다.

《중앙륙군 군관학교 제11기 제1총대 동학록(同学录)>에 따르면 1925년 6월부터 1926년까지의 황포군관학교 제3기 동학 성명 적관표(籍贯表)에는 한국 함경북도의 리빈(李彬),조선의 차정신(车廷信),한국의 장성철(张圣哲), 조선 한성(汉城)의 류철선(刘铁仙) 등 4명이 있다. 그리고 <황포동학총명책(黄埔同学总名册)>의 자료를 보면 3기에 리일태(李逸泰)가 더 있다.

외환과 내란을 겪고있던 19세기말 조선왕조는 근대화한 국가창립을 주도하게 된다. 개화파와 수구파가 모두 고종왕을 중심으로 한 군주제국가를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897년 8월 12일부터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 적관란에도 조선혁명자들을 조선인 혹은 한국인으로 등록되였던것이다.

이들 네 사람은 일찍부터 광주에서 활동하다보니 가장 일찍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 조선학생으로 되였다. 이 가운데서 차정신, 장성철, 류철선은 중국의 조기 항공활동에 참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은 류월한인회의 박태하와 함께 손중산의 지도로 설립된 항공학교에서 항공기술을 배웠으며 한동안 쏘련에 있는 조선인 조기 항공기술가 김공집(金公缉)과 함께 쏘련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그후 세 사람은 황포군관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황포군관학교 3기에 입교하였던것이다.

그 이듬해 제4기에 조선인 24명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권립 교수) 《우리 민족 청년들이 황포에 입학할수 있게 하기 위해 김원봉은 학교 당국과 교섭하여 우리 동포 청년들의 입학절차에 관한 협의를 달성하였습니다. 먼저 엄격한 심사와 시험을 거쳐 합격이 되면 반년간의 예비교육을 받고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되여야 입학시키기로 했습니다. 이리하여 황포 4기에는 24명이 입학하게 되였습니다. 제5기에는 6명, 후에는 10명 도합 45명의 우리 민족 열혈청년들이 입학했습니다. 1925년 통계에 의하면 황포와 그 산하의 병영에는 60여명 우리 민족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최림(崔林)으로 변성명한 김원봉이 제4기에 입학해서 강평국(姜平国), 류원욱(柳远郁), 박효삼(朴孝三), 박건웅(朴建雄), 양검(杨俭), 전의창(田义昌), 리우각(李愚悫), 권준(权■), 리집중(李集中), 왕자량(王子良), 윤의진(尹义进), 최영택(崔永泽), 김종(金钟), 리종원(李钟元), 로일룡(卢一龙), 리기환(李箕焕), 오세진(吴世振), 전홍묵(全洪默), 백홍(白红), 로세방(劳世芳), 박익제(朴益济), 문선재(文善在), 로건(卢建) 등 도합 24명이 입교했다.

황포 5기에는 100여명 조선청년들이 입교하였는데 1927년 4월 장개석의 정변으로 하여 자진 퇴교하거나 강제 축출당해 겨우 4명만 졸업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륙군군관학교 제21기 동학록》에도 제5기생으로 김호원(金浩元), 안유재(安维才), 장흥(张兴), 장익(张翼) 네 이름만 남게 되였다.

조선혁명가들은 학생신분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을뿐만 아니라 교직원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학교초기 쏘련군사학교를 졸업한 강섭무(姜燮武)가 포병훈련 교관 겸 쏘련고문의 통역으로 있었고 상해림시정부에서 온 김철남(金铁男)이 제3교도단(教导第3团)의 소좌(少校) 부단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조선혁명가 손두환(孙斗焕)이 황포군관학교 교장판공청 부관으로, 운남강무학당(云南讲武学堂)을 졸업한 리계동(李启东)이 부관으로, 리검운(李剑云)이 조교(助教)로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조선족 교직원으로는 양림(杨林)이 기술조교로 있었고 쏘련고문단과 함께 온 양달부(杨达夫) 일명 량도부(梁道夫)라고도 하는데 그가 포병교관으로 있었으며 3기 졸업생인 리빈(李彬)이 제4기 정치과 구대장(区队长)으로 있었다. 제5기 교직원들로는 중좌(中校) 주임교관에 양림, 황포탄 의거의 주역이였던 오성륜(吴成伦), 채원개(蔡元凯), 최추해(崔秋海), 안응근(安应根), 오명(吴明), 3기 졸업생인 리일태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제2보병대대 소좌(少校) 구대장 최추해가 바로 저명한 조선혁명가 최용건이다. 그리고 제6기 교직원으로는 채원개, 4기 졸업생인 박효삼(朴孝三), 공주선(孔周宣) 세 사람이 있었다. 이때 최용건은 이미 특무영(特务营) 제2련 련장을 맡고 교직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년간 학계의 연구를 거쳐 1927년까지 황포군관학교 본교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명단이 통계되였다. 그러나 당시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았던 험악한 상황에서 국적과 호적을 고치고 변성명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조선혁명가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수많은 조선 열혈남아들이 중국청년들과 함께 이곳에서 학습하고 생활했으며 무예를 익히고 군사기술을 련마하였다. 당시 사용했던 군교학생들의 제복, 무기, 두부모처럼 반듯하게 개여놓은 군인이불, 정숙한 교실을 돌아보노라니 씩씩한 황포군인들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것만 같았다. 

《분투정신은 주의(主义)에서 온다. 사병들의 정신을 발휘하려면 우선 주의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혁명적 주의가 있어야만이 우리 혁명이 목표가 있게 되고 혁명목표가 있어야만이 우리의 분투정신이 있게 된다.》 손중산총리의 연설을 가슴에 명기한 학생들은 열심히 혁명사상을 학습하였고 부지런히 군사기능을 련마하였다. 《혁명은 대중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오로지 대중을 무장하고 무력항쟁해야만이 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낼수 있다. 중국혁명이 승리하면 우리는 장강을 넘어서 북으로, 북으로 진격할수 있고 드디어는 조선으로 쳐들어가 일제를 몰아낼수 있다.》 이와 같은 열망을 안고 조선청년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학습과 훈련에 뛰여들었다.

이 시기 각지 국민혁명군 여러 부대도 군관학교나 강무학당을 설립해 우수한 장교들을 양성하기에 심혈을 기울렸다. 국민당은 각지 군교의 군사와 정치 교육을 통일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를 국민혁명군 중앙군사정치학교로 개칭하고 각지 군관학교와 강무학당을 황포군관학교에 합병하였다. 그리고 혁명의 수요에 따라 각지에 황포군관학교 분교를 설립하였는데 조주(潮州)분교, 남녕(南宁)분교가 비교적 유명하였다.

1926년 10월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하자 무한에 황포군관학교 분교가 설립된다. 그리하여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정치과의 500여명이 무한에 옮겨오게 되고 무한에서 195명의 녀학생을 받아 군교 녀학생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답사팀이 단서에 따라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에 찾아갔을 때는 광주 답사를 한 일주일후였다.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무한시 해방로 259번지에 위치했는데 지금은 호북성 무창실험소학교(武昌实验小学校)로 되여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와 운동장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창실험소학교 새 교학청사 뒤편으로 낡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거대한 단층 물이였는데 두부분으로 나뉘여있었다. 그 가운데 건물벽에는 흰대리석에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유적지라고 밝혀져있었다. 건물주변에는 10여메터 높이의 고목이 줄지어서 군인들의 씩씩했던 옛 모습을 보여주는듯 하였다.

  
사실 1927년 이후로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사명은 완수된셈이다. 그후 무한분교에 대부분 학원들이 집중되였다. 손중산의 서거로 하여 국민당도 분렬되여 황포군관학교 교장의 신분으로 국민당군의 실권을 잡은 장개석이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던것이다. 장개석은 남경에 《중앙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고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를 전면 교체해버린다. 또한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의 졸업식까지 남경에서 진행하였다. 이로써 대혁명시기의 중국혁명과 군사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되였던 황포군관학교는 사실상 자기의 력사적 사명을 끝마치게 된다.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 이후로 대부분 학생들은 무한분교나 남경에서 학습하고 졸업하게 되였던것이다. 《륙군군관학교 제21기 동학록》을 보면 그뒤 황포군관학교 제6기부터 21기까지 역시 조선인 혁명가들이 있었다. 제6기에 신석우(申硕雨), 최문용(崔文镛), 로식(鲁植) 원명은 김창만(金昌满)이 있었고 기병과(骑兵科)에 김진문(金真文), 김명산(金明山), 김은제(金恩济)가 있었다. 제8기 보병과에 리근호(李根浩)가 있었고 제20기 보병과(步兵科)에 김중진(金重镇), 기병과에 장철부(张哲夫)가 있었으며 제21기 포병대에 조동린(赵东麟)이 있었다. 조동린은 당시 24세로 조선 정주(定州)사람이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있었다는 설명까지 밝혀져있다.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대부분 건물은 1938년 일본참략자들의 폭격을 받아 파괴되여버렸다. 그후 1965년에 복원하기 시작하였고 1993년에 재차 수건하여 지금은 비교적 완정한 모습을 볼수 있게 되였다.

황포군관학교 정문을 나와 흰담을 따라 가노라면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를 나와 한동안 걸으면 황포군관학교부근의 붉은 벽돌과 흰 세멘트로 축조된 서양식건물을 볼수 있다. 하나는 총리사무청사 유적지로서 당시 손중산이 사무를 보던 곳이였고 하나는 군인구락부(俱乐部) 유적지로서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이 여러 가지 모임을 가지고 휴식하던 곳이였다. 군인구락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로천(露天) 수영장이 있었다. 입구의 흰 대리석석판에는 수영장에 관련한 설명이 있었다. 1926년 군교 학생들이 두개 못을 파서 수영장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지금 수영장은 사용하지 않고있었지만 부근 주둔부대 전사들이 이곳 공지에서 빨래를 말리고있었다.  
총리사무청사와 군인구락부, 수영장 유적지들은 길오른쪽에 차례로 있었다. 길왼편은 숲이 우거진 작은 산이 있었다. 손중산기념공원이였다. 키 높은 나무들사이로 돌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그 우에는 벽돌로 담을 쌓았고 담뒤에는 우뚝 솟은 기념탑이 있었다. 흰탑에는 《손총리기념탑(孙总理纪念塔)》이라고 새겨져있고 탑우에는 손중산기념동상이 있었다. 왼손으로 허리를 집고 오른 손을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밀고있는 모습이였다. 
저녁녘이 되여서 답사팀은 황포군관학교 유적지를 떠났다. 

수억 중국인민에게 국부(国父)로 존경받는 손중산에 의해 제1차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중국혁명과 세계 피압박 인민들의 중견인물로 될 수많은 혁명, 군사인재를 양성해낸 황포군관학교가 있게 되였던것이다. 이 배움의 터전에는 훗날 국민당의 항일명장들인 장치중(张治中), 두률명(杜聿明)이 있었고 중국공산당의 엽검영(叶剑英), 섭영진(聂荣臻), 림표(林彪), 진의(陈毅), 진갱(陈赓), 서향전(徐向前), 좌권(左权), 주사제(周士弟), 류지단(刘志丹), 라서경(罗瑞卿)을 비롯한 장성급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망국의 한을 지니고 이국땅 만리에서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했던 조선의 지사들은 바로 이들과 함께 혁명과 군사 지식을 배웠고 중국혁명의 격변속에 반일독립투쟁의 길을 모색했던것이다.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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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埔军校 황포군관학교 중국자료

中華民國陸軍軍官學校  대만자료              
대만 육사(중화민귝육군군관학교)의 현재 로고...황포군관학교를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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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분야
성격 군사교육기관
설립시기 1924년 1월
해체시기 1931년 10월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중국국민혁명에 필요한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1924년 1월 중국 광저우(廣州)에 설립된 군사교육기관.




설립 목적

1924년 1월 중국 광저우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립되었고, 군벌세력의 타도와 국민혁명(國民革命)의 완성을 목표로 하였다.

황포군관학교는 이같은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이루어진 합작의 결실인 동시에, 그 현장이었다. 설립 목적은 “순원(孫文)의 혁명종지(革命宗旨)를 관철하고 군사와 정치인재를 양성하여 황포학생으로써 혁명군의 골간으로 삼아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을 타도함으로써, 국민혁명(國民革命)의 목적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연원 및 변천

순원은 제1차 국민당 전국대표대회 직후인 1월 24일장제스(蔣介石)을 군관학교 설립준비위원장에 임명하였고, 2월 6일 설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6월 16일 개교기념식 행사가 거행되었다. 개교 시의 정식명칭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中國國民黨陸軍軍官學校)’였으나, 그 소재지가 “광저우에서 40여리 지점으로, 주위 20여리가 울창한 삼림으로 둘러싸인 황포도(黃埔島)”였기 때문에, 흔히 황포군관학교로 불리운다.




황포군관학교의 명칭은 이후(國民革命軍中央軍事政治學校, 1926. 2), ‘국민혁명군군관학교’(國民革命軍軍官學校, 1928. 9)로 변경되었다가, 1928년 3월난징(南京)에 설립된 국민당정부의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로 계승되었다. 황포도의 군관학교는 1929년 9월 7기생을 배출한 다음, 1931년 10월 폐쇄되었다.

교육목표는 국민혁명을 주도할 군사간부의 양성이었고, 우한(武漢)·차오저우(潮州)·난닝(南寗)·난창(南昌)·뤄양(洛陽)·청두(成都)·쿤밍(昆明) 등지에 분교를 설치하였다. 무한분교는 중국국민당 좌우파의 대립 및 ‘무한국민정부(武漢國民政府)’ 수립 등을 배경으로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세력의 합작으로 운영되었고, 제1차 국공합작의 파탄과 함께 1927년 8월 폐교되었다. 때문에 무한분교의 교관 및 입교생들은 남창봉기(南昌蜂起)와 광주봉기(廣州蜂起)로 이어지는 1927년 후반기 국공합작의 파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분교 중 가장 많은 한인이 입교하였다.




설립당시 황포군관학교는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소속으로서, 최고 운영기구는 교본부(校本部)였다. 교본부는 순원(총리)·장제스(교장)·랴오중카이(廖仲愷, 당대표)로 구성되었고, 교수부·교련부·관리부·군수부·군의부·정치부·총교관실 등이 설치되었고, 각부에는 예젠잉(葉劍英, 교육부 부주임)·덩옌다(鄧演達, 교련부 부주임)·저우언라이(周恩來, 정치부 부주임) 등 중공당의 유력인물들이 운영에 참여하였다.




입교생 조직인 학생총대(學生總隊)는 4개 대(隊) 12개 구대(區隊)로 편제되었고, 입교생은 ‘학원(學員)’으로 불렸다. 교육기간은 3년이었으나, 국민혁명의 인적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실제 교육기간은 단축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각기 특별당부를 설치하여 세력 확장에 골몰하였고, 입교생들도 순원주의학회(孫文主義學會)와 청년군인연합회(靑年軍人聯合會) 로 양분 대립하였다.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대립 양상이 파국으로 치닫던 1920년대 중반 한인입교생들은 국공분열의 현장에서 중국국민혁명의 실상과 허상을 목도하고 있었다.


한인의 입교 경위


한인의 황포군관학교 입교경위는, 설립이래 상하이(上海)에서 입교생 모집활동을 주관한 국민당정부의 실력자 천궈푸(陳果夫)를 통한 경우가 밝혀진다. 그는 조소앙(趙素昻)·박찬익(朴贊翊)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세력이 추천한 한인을 광저우로 보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시켰다.




황포군교와 임정과의 연계는 채원개(蔡元凱)와 공주선(孔周宣)의 교관 재직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두 사람은 이미 1923년 임정 외곽단체인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의해 중국군벌정권 군사학교에 파견, 수학한 바 있었다. 특히 공주선의 황포군교 재직시 연락처가 ‘상하이 프랑스조계 백내니몽(白來尼蒙) 마랑로(馬浪路)숭일리(崇一里) 16호 최석순(崔錫淳)’이었던 사실은, 공주선이 황포군교 입교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한인의 입교는 의열단(義烈團)의 경우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924년 1월 국공합작의 성립을 계기로 의열단은 창단 이래 견지해 온 의열투쟁 노선의 재검증 필요성에 직면하였다. 의열단의 자기성찰은 대중투쟁 노선으로의 전환으로 귀결되었고, 전민중의 각성 단결과 조직화를 위한 의열단 스스로의 자기혁신이 우선 과제로 제기되었다. 의열단 지도부는 중산대학(中山大學)과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통한 자기무장의 길을 선택하였고, 김원봉(金元鳳) 등은 순원과의 면담에서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허락받았다.

의열단원의 황포군교 입교에는 이 시기 광동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주요인물이었던 손두환(孫斗煥)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밝혀진다. 1926년 봄김원봉과 김성숙(金星淑)은 황포군교 교장실 부관 겸 교관으로 재직 중이던 손두환의 중개로 장제스 교장을 방문하고, 황포군교 입교 및 학비면제 승락을 받았다.




또 여운형(呂運亨)은 순원을 비롯한 국민당정부 주요인물들과의 유대관계를 매개로 한인의 입교에 공헌하였다. 그는 1926년 1월 광동에서 소집된 중국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 순원의 ‘연소용공·공농부조(聯蘇容共·工農扶助)’ 정책을 지지하고 세계 피압박민족의 연합과 한중연합을 통한 반제국·반일투쟁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장제스·덩파(鄧發, 부교장) 등과의 접촉을 통해 국민당정부의 지원 확보와 한인의 입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덩파와의 면담에서, 국제적 연대 형성을 위한 한인 입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장제스는 한인의 입교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재만 독립군단체인 통의부(統義府)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비롯하여, 중국공산당 조직을 통한 만주·노령지역의 한인청년들이 황포군교에 입교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한편 한인의 입교에는 광저우·우한지역의 유력한 한인독립운동 단체인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粵韓國革命同志會)와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鄂韓國革命靑年會)가 동참하였다. 1926년 경 광동지역의 유력한 한인단체였던 유월한국혁명동지회의 핵심인물은 손두환·김성숙이었고, 1927년 4월 경에는 김원봉·이영준(李英俊)·김산(金山) 등의 진보적 인물들이 동참하고 있었다. 이들은 황포군교에 입교 중인 한인교관 및 입교생과 광주지역의 한인독립운동 세력을 연계하여 ‘통일된 민족주의정당’의 건설을 시도하는 등,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유악한국혁명청년회는 무한분교 측의 의뢰 하에 한인사회를 무대로 입교생 모집활동을 전개하는 등, 한인의 입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들은 국민당 및 공산당 세력과의 연대 구축을 시도하는 한편, 민족유일당의 결성을 지향한 독립운동 노선의 재정비에 몰두하였다.




제1차 국공합작 시기인 1927년 말 까지만 하여도, 황포 본교 및 무한분교에는 다수의 한인이 교관 및 학생·입오생(入伍生)으로 입교하였고, 교도단(敎導團) 등 예하 각급 군사시설에도 상당수의 한인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정확한 수효와 구체적인 신상을 파악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한인들은 입교 시 한국과 중국의 이중국적을 소지하였고, 길림성(吉林省)·요녕성(遼寧省)·흑룡강성(黑龍江省) 등으로 출신지역을 위장하는 한편,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일제 정보망의 포착과 이로 인한 국제적인 분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한인 입교생 상황

『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에서 확인되는 한인 입교생의 상황을 살펴보면, 본교의 경우, 3기생(1925. 7∼1926. 1); 이빈(李彬)·이일태(李逸泰)·차정신(車廷信)·장성철(張聖哲)·유철선(劉鐵仙, 이상 5명),




4기생(1926. 3∼1926. 10); 강평국(姜平國)·유원욱(柳元郁)·박효삼(朴孝三)·박건웅(朴建雄)·최림(崔林, 金元鳳)·양검(楊儉)·전의창(田義昌)·이우각(李愚慤)·권준(權晙)·이집중(李集中)·왕자량(王子良)·윤의진(尹義進)·최영택(崔泳澤)·김종(金鐘)·이종원(李鍾元)·노일룡(盧一龍)·이기환(李箕煥)·오세진(吳世振)·김홍묵(金洪黙)·백홍(白紅)·노세방(勞世芳)·박익제(朴益濟)·문선재(文善在)·노건(盧建, 이상 24명),




5기생(1926. 11∼1927. 8); 신악(申岳)·안유재(安維才)·장익(張翼)·김호원(金浩元)·장흥(張興, 이상 5명),




6기생(1928. 4∼1929. 5); 김정문(金貞文)·김명산(金明山)·김은제(金恩濟)·이춘암(李春岩)·최문용(崔文鏞)·오상선(吳尙善)·노식(魯植)·신석우(申碩雨)·김근제(金槿濟, 재학중 사망, 이상 9명)이었다.




이어서 7기생 이후 한인 졸업생은 다음과 같이 밝혀진다. 7기생; 이석(李石), 8기생; 이근호(李根浩)·나월환(羅月煥), 10기생; 왕중량(王仲良, 羅泰燮)·고일명(高一鳴, 高時福)·왕형(王衡, 安椿生)·왕신호(王信虎)·조동윤(趙東潤)·노태준(盧泰俊, 李無雄)·김동수(金東洙)·한대원(韓大源)·김고두(金高斗)·왕자인(王子仁)·이의흥(李義興)·김동일(金東一)·진동명(陳東明)·신계서(申繼瑞)·진국동(陳國東, 金裕哲),




11기생; 장병훈(張炳勳)·조열광(趙烈光)·이지강(李志剛, 李相勳)·진낙삼(陳樂三)·조황(曹晃, 千暻伊)·최영빈(崔英賓)·유장환(劉章煥)·왕수의(王守義)·유민(劉敏)·최양성(崔陽成)·김병화(金炳華)·이철중(李鐵重)·이운산(李雲山, 張致文·李雲煥)·관건(關鍵, 黃載衍)·엽홍덕(葉鴻德)·강지산(康志山, 蔣載福)·이청산(李靑山, 金貞彩)·오주국(吳柱國, 白贊基)·이국화(李國華, 韓道源)·이철부(李鐵夫, 金世雄)·김해석(金海石, 朴珍守·朴景一)·서홍(徐洪)·구양군(歐陽軍, 朴基成)·이현근(李炫瑾),




12기생; 노복선(盧福善)·김용무(金用楙)·진경성(陳敬誠, 申松植)·김태삼(金泰三)·김철(金鐵),




15기생; 유해준(兪海濬), 16기생; 이규학(李奎鶴)·김응삼(金應三, 韓道明),




18기생; 송면수(宋冕秀)·왕영수(王永秀, 閔泳秀),




19기생; 이윤장(李允章),




20기생; 김중진(金重鎭)·강홍모(姜弘模)·이건국(李建國)·장철부(張哲夫),




21기생; 조동린(趙東麟),




22기생; 김영훈(金英勳)·박위택(朴胃澤)·김현규(金現奎)·박천마(朴天馬)·이시엽(李時燁)·김중달(金重達)·김명규(金明奎)·안창도(安昌道)·오용필(吳用弼)·정기엽(鄭基燁)·장해덕(張海德)·박윤호(朴允鎬)·권필현(權必鉉)·장정근(張定根)·김정인(金正仁)·안수성(安秀成)·김시구(金是九)·김치삼(金致三)·이성만(李成滿)·박성남(朴成男)·허지수(許志秀)·서삼철(徐三哲)·이학서(李鶴瑞)·김병철(金炳喆)·김광진(金光進)·문시욱(文時旭)·이원곤(李元坤)·김로(金露)·김은석(金銀錫)·강일영(康一永)·이학률(李學律)·조동희(趙東熙)·백현일(白賢一)·이시봉(李時奉)·김대위(金大衛)·김병선(金柄善)·문창덕(文昌德)·박재준(朴在俊)·나태규(羅泰奎)·한창섭(韓昌燮)·최용산(崔龍山)·김용호(金龍浩)·문창흥(文昌興)·김은령(金恩嶺)·김백운(金白雲)·김일건(金一鍵)·배호원(裵豪元)·오귀성(吳貴星)·문인준(文仁俊)·이원경(李元敬)·양치호(楊致昊).




이와함께 무한분교의 경우는, 박시창(朴始昌)·진공목(陳公木)·진갑수(陳甲秀)·안동민(安東民)·안자산(安自山)·사검인(史劍仁)·왕구(汪炬)·관추(關秋)·조국동(趙國棟)·안동만(安東晩)·송욱동(宋旭東)·김준(金俊)·유광세(劉光世)·김치정(金致廷)·이종(李鍾, 이상 정치과)·유원도(柳源道)·박태섭(朴泰燮)·진용학(陳龍鶴)·백규(白珪)·이건(李建)·최승연(崔承淵)·김희철(金熙喆)·박우균(朴禹均)·이춘식(李春植)·이벽파(李碧波, 이상 포병과) 등이 1927년 무렵 5기생으로 재학하였다.




이들은 유악한국혁명청년회 회원이었으며, 1927년 12월의 이른바 ‘광주봉기(廣州蜂起)’에 참가하여, 대부분 희생되었다. 이외에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한인으로는 신춘(申春)·조기석(曺基錫)·이경수(李京守)·주열(朱烈)·최정무(崔鼎武)·배순명·윤호·김준·박근만·박근수 등의 이름이 밝혀진다.







한인 교관 상황

한편 4∼7기생 시기에는 다수의 한인이 교관 및 지휘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을 통해 신원이 밝혀지는 인물로는, 4기생 시기; 양도부(梁道夫, 러시아포교관)·양녕(楊寧,양림, 기술조교련)·이빈(李彬, 정치과대대 구대장),




5기생 시기; 오성륜(吳成崙, 러시아어 교관)·오명(吳明, 훈련부 기술조교)·양녕(훈련부 기술주임교관)·채원개(蔡元凱, 학생대 대부)·최추해(崔秋海, 학생대 구대장)·안응근(安應根, 학생대 구대장)·이일태(李逸泰, 학생대 구대장),




6기생 시기; 박효삼(朴孝三, 학생대 구대장)·공주선(孔周宣, 중대장)·채원개(편집위원),




7기생 시기; 방우용(方禹鏞, 군의처 과원) 등이 있다. 이외에 손두환·김철남(金鐵男)·김산·강평국(姜平國)·강섭무(姜燮武)·이유곤(李柳昆)·권준(權晙)·박영(朴英)·이지선(李枝善) 등의 교관 재직 사실이 알려진다.




한인 입교생과 교관들은 혁명군인회(革命軍人會)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교장 장제스의 양해 하에 광둥·우한지역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하였을 뿐 만아니라, 만주·노령지역을 무대로 비밀리에 입교생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혁명군인회는 130여 명의 회원과 60여 명의 찬조원으로 구성되었고, 본부는 황포군교 내에 설치되었다.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는 않지만, 130여 명의 회원 중에는 교관 및 정규과정의 4기생 24명을 비롯하여, 학생군(學生軍)·입오생(入伍生)·교도단(敎導團) 소속의 한인들과 광동지역 한인독립운동가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입교 생활

교육내용은 이론교육과 실제 훈련교육이 중시되었으며, 근대적인 사회과학 교육을 통해 정치군관(政治軍官)으로서의 식견을 갖추어 갔다. 4기생의 교육과목을 살펴보면, 군사교육과목; 전술학·군제학·병기학·축성학·교통학·지형학·경리학·위생학·마학(馬學)·교련진중근무(敎鍊陣中勤務)·전범령(典範令)·복무제요(服務提要)·기술·마술(馬術)·측도연습(測圖演習·전술연습·야영연습, 정치교육과목; 중국국민당사·삼민주의·제국주의침략중국사·중국근세사·제국주의·사회진화사·사회과학개론·사회문제·사회주의·정치학·경제학·경제사상사·각국헌법비교·군대정치공작·당적조직문제·정치경제지리 등이었다.




한인 입교생들은 체계적인 군사지식의 습득과 국공대립으로 인한 국민혁명의 난관을 현장에서 체험함으로써, 혁명세력 내부의 분열과 민족모순을 극복하는 일이 근대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최우선 과제임을 자각하였다. 더욱이 4기생 입교시기에는 교장 장제스가 북벌전(北伐戰)에 직접 참가한 관계로 황포군관학교의 운영과 교육은 중국공산당원 교관들이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한인 입교생들이 중국공산당 조직에 가입하였거나,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무렵 황포군관학교를 방문한 소련대표단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오성륜(吳成崙)을 통해 황포군교에 재학 중인 의열단원들과 면담을 희망하였다. 이에 의열단 소속 입교생들은 소련대표단 숙소를 방문하였고, 함께 기념촬영도 하였다고 한다.




입교생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영향력은 무한분교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나타났다. 무한분교는 1926년 11월 조직된 초고위원회(招考委員會)에 중국공산당 간부들이 포진한 이래, 공산주의 이론에 입각한 정치교육이 강화되었다. 그 결과 입교생들의 혁명관은 공산주의적인 모습으로 변모해 갔는데, 200여 명을 헤아린 한인입교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는 1927년 4월 장제스의 반공쿠데타 이후 엄중해진 국민당정부의 공산당 탄압과 맞물려 한인입교생들의 발걸음을 광저우로 재촉한 배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무한분교의 한인 입교생들은 1927년 7월 광저우로 향한 원정길에 올라, 황포군관학교와 예하 시설에 수용 중이던 한인들 및 광동지역 한인세력들과 함께, 12월 11일의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광주봉기는 ‘3일천하’로 끝났고, 이 과정에서 적지않은 한인입교생과 교관이 중국공산당을 위해 희생되었다.




한인 입교생들의 중국공산당으로의 경도 현상에 대한 국민당정부의 우려는 심각한 것이었다. 한인에 대한 입교우대 조처가 철회되었고, 이후 국민당정부는 ‘만주사변’ 발발 시 까지 중국군에 복무 중인 한인장교를 일선부대장에 임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인 입교생들은 체계적인 군사지식의 습득과 국공대립으로 인한 국민혁명의 제난관을 현장 체험함으로써, 혁명세력 내부의 분열 극복과 모순의 해결이 근대민족운동의 일차 과제임을 자각하였다. 또한 한인 입교생들은 이 과정에서 체득한 국민혁명의 논리를 디딤돌 삼아 1920년대 후반기 한인독립운동의 진로 설정에 고심하였다.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위해 분투하고 황포정신을 발양함으로써, 국민혁명의 완수를 의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한 한인 졸업생들의 행로는 북벌(北伐) 및 국민혁명이라는 중국대륙의 정세 변화 속에서 다양하게 모색되었다.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며 한인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그룹, 중국공산당 조직으로 편입되어 공산주의운동에 투신하는 인물들, 광주봉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져 간 집단과 함께, 민족협동전선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재정비를 모색한 인물들이 남긴 족적이 그것이다.







졸업 후 진로

한인졸업생의 상당수는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소위로 임관되어 북벌군 및 각급 부대에 배속되었다. 3기생의 경우, 이빈(李彬)은 4기생 정치과 학생대대 구대장으로 근무하였고, 1927년 12월의 광주봉기에 포병지휘원으로 참가하여 사망하였다. 이일태(李逸泰)는 5기생 구대장으로 근무한 이래, 중국군에 복무하며 한인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차정신(車廷信)·장성철(張聖哲)·유철선(劉鐵仙) 3인은 소련 모스크바항공학교에 유학하였고, 이후 중국공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4기생의 경우, 김원봉(金元鳳)은 일시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에 근무하며 협동전선운동을 모색하였고, 박효삼(朴孝三)·강평국(姜平國)은 사하병영(沙河兵營) 입오생부 교관으로 재직하였다. 권준(權晙)은 중국군 제6군 포병영 부영장 및 무한분교 훈련부 교관으로 근무하는 한편, 유악한국혁명청년회 비서로서 무한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이외에 김종(金鐘)·이집중(李集中)·양림(楊林)·노일룡(盧一龍)·박건웅(朴建雄)·이우각(李愚慤)·오세진(吳世振)·노세방(勞世芳) 등이 중국군으로 복무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후일 의열단·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 활동의 중추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5기생의 경우, 박시창(朴始昌)은 중국군에 복무하며 중국육군대학을 수료하였다. 그는 1943년 이후 광복군총사령부 고급참모 등으로 활동하였다. 장흥(張興)은 주로 중국군 헌병기관에 근무하며, 한인독립운동가들의 통신 연락활동과 신변보호에 진력하였다. 신악(申岳)은 일시 중국군에 복무하였으나, 곧 중국군적을 포기하고 의열단 활동에 합류하여 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광복군 간부로 활동하였다. 6기생의 경우, 이춘암(李春岩)이 중국군 정보기관에 근무하며 의열단·민족혁명당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김근제(金槿濟)는 중국 공군비행사로 근무 중, 일제말기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였다.




이들과 함께 광둥·우한을 중심으로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해 간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은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재학 중인 김성숙·강세우·이영준·김산·최원·이활 등을 비롯하여, 유악한국혁명청년회 회원들과 더불어 국공합작의 결렬이라는 1920년대 후반기 중국의 정세를 배경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과 항일투쟁 노선의 재정립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유일독립당촉성회운동(唯一獨立黨促成會運動)에 적극 동참하였고,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 활동으로 그 진로를 모색하였다.

특히 김원봉·이영준·박건웅 등은 의열단(義烈團)의 재건을 통한 협동전선운동을 시도하는 한편, 안광천(安光泉) 등 조선공산당내 협동전선론자와 연합하여, 1929년이래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좌파 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교관으로 활동한 양림(楊林)·최추해(崔秋海)와 무한분교 졸업생인 진공목(陳公木)·김치정(金致廷) 등은 중국공산당 및 조선공산당에 입당 활동하였고, 4기생 이기환(李箕煥)과 무한분교 졸업생인 장해평(莊海平)은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연합하여, 자유연합(自由聯合)과 상호부조(相互扶助) 원리에 입각한 이상촌(理想村)건설 사업으로 자신의 항일진로를 결정하였다.

이처럼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한인독립운동가들은 입교 중 체험한 중국 국민혁명의 논리와 국공합작 원리를 기반으로 졸업 후 자신의 항일역정을 선택하였다. 중국군에 복무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한 인물, 1920년대 후반기 국내외에서 확산되던 민족협동전선운동에 참여한 인물들, 공산주의운동 및 아나키즘운동 등 이들과는 또 다른 항일행로를 개척해 간 인물들, 참으로 다양한 면모로 한국현대사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졸업 후 항일투쟁 과정에서 남긴 발자욱의 모습은 달랐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조국광복·민족해방으로 합일되었고, 그 출발은 황포군관학교에서 현장 체험한 국민혁명의 논리에서 잉태되었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한국과 중국현대사에는 황포군관학교를 매개로 한 반일 혈맹의 유대와 공감대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와 더불어 1930년대 초반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한인의 항일역량에 대한 중국민의 평가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국민당정부는 한인독립운동세력을 그들의 항일전쟁 체계 안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그 결과 한·중 연합의 일환으로서, 하남성(河南省)낙양(洛陽) 소재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는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 정식명칭: 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洛陽分校 第2總隊 第4大隊 陸軍軍官訓練班 第17隊)이 설치되어, 1934년 2월부터 1935년 4월까지 92명의 한인독립운동가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근대적인 군사교육 과정을 이수한 한인입교생들은 조선민족혁명당과 한국국민당의 주요 역량이 되었으며, 나아가 1930년대 한인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도 기여하였다.




또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당원을 주축으로 한 한인혁명가 90여 명이 장시성(江西省) 싱즈(星子) 소재 성자분교와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 소재 호북분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이들은 13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1938년 3월부터 약 3개월 간의 교육훈련을 거쳐, 국민당정부의 항일전선에서 활동하는 한편, 1938년 10월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창건에 주력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황포군관학교의 한인입교생들은 졸업 후에도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라는 이력을 매개로, 중국민당정부 군부의 핵심인물들과 연계 형성이 가능하였다. 특히 4기생 출신인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와 황포동학회(黃埔同學會)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한인독립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직후 의열단에서는 황포군관학교 동기생들이 주축을 이룬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의 재정적·물질적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운영하여, 1935년까지 130여 명의 ‘청년투사’를 양성하였다. 이외에도 국민당정부 군부는 항일전쟁 전기간을 통해 의열단세력이 중심이 된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의용대를 중점적으로 지원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황포군관학교 ‘동학(同學)’이라는 인연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참고문헌

•황포군교동학록 (호남성당안관 편, 호남인민출판사, 1989)


•黃埔軍官學校と朝鮮の民族解放運動 (水野直樹)


집필자

집필 (2009년)한상도(건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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