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帝國 愛國歌와 君が代(기미가요) 역사속으로




우리나라 最初의 軍樂隊長 Franz Eck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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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애국가의 왜곡된 상징성



[경향신문 2004-08-18 18:30:24] 부분참조



1882년 조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국기를 제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조정 역할을 맡은 청나라의 마건충은 중국 용기(龍旗)를 모방해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리라는 따위의 조언을 했다. 그러면서 황색은 황제의 상징색이므로 속국에서는 이 색을 써서는 안된다고 제언했다.
고종은 분개했다. 결국 고종의 지시에 따라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을 적색과 청색으로,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괘를 붙이게 했다. 그리하여 태극은, 적색의 머리 부분과 청색의 꼬리 부분은 위로 가게 했으며 4괘는 위에 왼쪽부터 손(巽)과 진(震)을, 아래에 왼쪽부터 이(離)와 간(艮)을 배치했다. 최초로 만든 국기였다.

마침내 박영효가 조미조약체결의 대표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갈 때 영국 선장의 의견을 참작해 태극과 8괘를 배치하되 태극에는 음양을 나타내는 붉은 색과 푸른 색을 사용하는 기를 만들었다.

조정은 박영효의 보고를 수용하여 1883년 1월27일 전국에 공포했다. 이때부터 공공건물에 국기를 내걸었고, 이를 태극기라고 불렀다. 이 대목에서 한번 따져보자. 자주국가를 표방하면서 왜 하필 중국의 고전인 주역의 원리를 국가의 상징인 국기에 올렸나.

비록 주역이 동양의 보편적 사상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상징물로 삼은 것은 가치의 혼돈을 가져올 수 있다. 더욱이 터무니없게도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주장한 마건충의 제의를 일부 수용한 것도 흠이다. 물론 태극과 8괘는 우리의 전통문양으로 널리 쓰여져 왔다. 또 주역사상은 우리의 생활과 의식 속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그 원리를 중국 고전인 주역에서 빌려왔다면 우리의 자주의식에 생채기를 낼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역의 원리에도 크게 어긋난다. 우주와 음양을 상징하는 태극을 중심에 둔 것은 접어두고라도 8괘 중에 4괘만 빌려왔다는 결함을 지적 받을 수 있다. 건곤(乾坤)은 천지와 부모, 감이(坎離)는 물과 불 또는 둘째 아들과 둘째 딸을 나타낸다. 큰 아들 딸과 막내 아들 딸을 나타내는 괘들은 빠져 버린 것이다.

또 국기가 너무 복잡하여 그 뜻을 알기도, 그리기도 어렵다. 대중성이 떨어진다. 원리를 터득하고 제대로 그릴 줄 알려면 상당한 교육이 필요하다. 국기는 국가의 상징이므로 단순 명쾌하게 국민에게 다가가야 하는데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 가지 더. 태극기를 처음 사용하고 공식화한 인물이 박영효였다. 그는 초기 개화파로 근대화 과정의 주역이었으나 친일파로 전락했다. 임금의 사위였지만 일제에 협력하면서 온갖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그의 친일행적을 덮어둘 것인가? 이는 결국 태극기의 상징성을 모독하는 결과를 빚는다.

이제 애국가의 제정과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애국가는 1880년대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운동이 일어날 때 지어 불렀다. 서양 국가를 참작해 여러 단체와 개인이 국가의식이나 시가 행진 때 불렀다. 1890년대부터 나돌기 시작한 애국가는 나필균, 전경택, 새문안교회, 배재학당 등에서 지어 부른 것 등 10여종에 이르렀다.

이와함께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국가 상징물로 애국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01년 의정대신 윤용선에게 국가(國歌) 제정을 명령한다. 이때 왕립군악대 지도자로 초빙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는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다. ‘상제(上帝)는 우리 황제(皇帝)를 도우소서’로 시작되는 이 애국가는 이후 한일합방 때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로 사용됐다.


대한뎨국 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

참조 동영상32.4MB(kbs스펀지)2005년 2월 5일 방영

문임(文任;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작사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1852.4.5-1916.8.6) 작곡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사*
셩슈무강(聖壽無疆)하*사*
해*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싸*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뜰치사*
오쳔만셰에 복녹(福祿)이 일신케 하*소셔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

* ; 아래아
싸; ㅂ+ㅅ+.
뜰; ㅅ+들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Dass sich seine Jahre mehren
Zahllos wie der Sand am Strande,
Der sich hoch zur Dune haufet,
Dass sein Ruhm sich leuchtend breite
Weithin uber alle Welten,
Und das Gluck des Herrscherhauses
Tausendmal zehentausend Jahre
Neu mit jedem Tag erbluhe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 각주
상뎨 : 하늘을 다스리는 신, 하느님. God
셩슈무강: 聖壽: 황제의 나이, 수명.황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말.
Long life of His Majesty.
해옥듀 : 장수를 송축할 때 쓰는 말. 신선이 산다는 해옥은 선학(仙鶴)이 매년 한 개씩 물고 온 대오리로 지었다는 전설이 있음.
위권 : 위엄과 권세, 위광과 권력. Dignity and authority.
환영 : 천하 또는 세계
복록 : 타고난 복과 녹 즉 삶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일신 : 날로 새로워 짐.

하느님 우리 황제를 보호하소서.
사구(沙丘)에 높이 쌓인
해안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만세소서.
멀리 온 세계에 명예가 빛나며 뻗치소서.
그리고 황실의 행복이 천세 만세토록 매일 새로이 꽃피소서.
하느님 우리 황제를 보호하소서.


● 광무 5년(1901년) 1월 27일 광무황제폐하의 황명으로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에게 제정을 명함.
2월 19일 독일 해군 군악대장 프란츠 에케르트 고빙(雇聘).
9월 7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광무황제폐하 만수성탄진연 (萬壽聖誕進宴)에 초연함

● 광무 6년(1902년) 8월 15일에 공식 제정.

● 광무 8년(1904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학부(學部)에서 각 학교 애국가를 정리하기 위하여 각 학교에 신칙(申飭)하되 군악대에서 조음한 국가를 효방(效倣)하여 학도를 교수(敎授)하라 함

● 1968년 8월 7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박사에 의해 발견 70년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씨가 87년 단국대 김원모교수가 뉴욕시립도서관에서 앨런( 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9. 4. 23 ∼ 1932. 12. 2)문서중에서 소책자 발견.

君が代(기미가요)

'君が代は 千代に 八千代に さざれ石の 巖となりて 苔の むすまで'
(きみがよは ちよに やちよに さざれいしの  いわおとなりて こけの むすまで)
-- 그대여, 작은 돌(자갈과 같은 작은 돌)이 큰 돌(바위)이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천년 만년 오래 오래 사십시오)라는 뜻임. 즉 천황의 만수무강을 비는 노래라고 할 수 있음. 기미가요라는 제목은 가사 첫머리의 기미가요와에서 따온 것임.

일본의 국가(國歌)이다. 가사는 5줄 31음절이고, '파'와 '시'가 없는 일본 5음계를 기본으로 한 4분의 4박자 곡이다. 가사는 '천황의 통치시대는 천년 만년 이어지리라. 모래가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천황의 시대가 영원하기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이 가사의 원형은 일본 전통시로, 10세기 초 발간된 일본의 고유시 시집인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에 실려 있는 〈와가 기미와(우리 님은)〉로 알려져 있다. 또한 10세기 말 만들어진 《와칸로에이슈[和漢朗詠集]》에도 〈기미 가요와(님의 시대는)〉라는 제목으로도 실려 있다.

원래 이 노래는 성스러운 행사나 축제 만찬에서 불리웠는데, 1868년 일본에 있던 영국인 군악단장 존 펜턴(John Fenton)이 제의하여 기존 기미가요의 싯구에 서양곡이 처음으로 붙여졌으나 당시에는 국가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1880년 궁내성 아악과 직원인 히로모리 하야시[林廣守]가 현재 기미가요의 곡을 만들었으며,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때 완성된 곡이 메이지 천황의 생일축가로 처음 불려진 뒤 일본의 국가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폐지되었다가 1999년 일본의 국가로 법제화되었다. 군인도 아닌 극우단체 회원들이 군복을 차려입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때 주로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이 노래를 조선인의 황민화 정책을 위해 하루에 1번 이상, 또한 각종 집회나 음악회, 각 학교 조회시간, 일본 국기 게양과 경례 뒤에 반드시 부르게 하였다.

그밖에 일제강점기에 기미가요처럼 강요된 제2의 일본 국가인 《바다로 가면》[海行か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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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에케르트(Eckret, Franz. 1852-1916)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됨


군악대 창설자 및 국가 작곡가이다. 1896년 민영환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겸하여 영국 독일 불란서 오스트리아 미국 등을 방문하고 돌아와 서양 문명을 보고하면서 새로운 제도를 건의하는 가운데 군악대 설치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 후 1900년 12월 군악대 설치를 법령으로 공포하고 일본에서 귀국하려던 독일인 음악가 에케르트를 초청하여 한국에 1901년 2월 7일 입국하였다.

<서양식 군악대 창설>
1896년 전권특명대사 자격으로 러시아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온 민영환(閔泳煥)이 군악대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서양식 군악대 창설계획이 수립되자 당시 독일공사 바이파르트(Weipart)는 한국 양악대의 지도자로 그 무렵 일본 해군군악대를 지도하고 있던 독일인 에케르트(Eckert,F.)를 추천하였고, 1901년 2월 에케르트의 도착과 함께 양악대 창설에 필요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에케르트 [Eckert, Franz von, 1852.4.5~1916.8.6]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국적 독일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독일 슐레지엔
주요작품 《게오르기카》 《프랑스모음곡》 《마법의 바이올린》 《페르 퀸트》

슐레지엔 출생. 1879년 일본으로 건너가 해군 군무국에 근무하다가 1900년 한국에 군악대가 창설되게 되자 민영환(閔泳煥)의 동생 민영찬(閔泳讚)이 주한 독일공사와 협의 군악대 교사로 그를 초빙하였으며, 그는 1901년 2월 50인조 정규 군악대의 각종 악기를 가지고 내한하였다.

그 이듬해 8월 민영환 작사에 곡을 붙여 대한제국 애국가를 발표하고, 또 매주 목요일에 탑골공원에서 연주회를 가져 모차르트, 바그너, J.슈트라우스 등의 음악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10년 국권피탈로 군악대가 해체되고 이왕직(李王職)양악대로 바뀌자 악대의 지휘를 백우용(白禹鏞)에게 맡기고 자신은 개인지도 등으로 음악활동을 계속하였다.

독일음악이 한국에 들어오는 데 가교역할을 하였으며, 한국 현대음악의 선구자인 김형준 ·이상준 ·백우용 ·정사인 ·김재호 ·홍난파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독일공사 바이파르트가 외부대신 조병식에게 보낸 서한
Herr Minister!
Euer Excellenz sehr gefälliges Schreiben vom 29.v.M., mit welchem Sie mir mitteilen, daß seine Majestät gnädigst geruht habe, dem Deutschen Reichsangehörigen Musikdirektor F. Eckert in Anerkennung seiner Verdienste um die Komposition der koreanischen Nationalhymne und den hiesigen Musikunterricht die 3te Klasse des Tai keuk Ordens zu verleihen, habe ich zu erhalten die Ehre gehabt. Herr Eckert, dem ich die mitübersandte Dekoration und das Patent alsbald übermittelt habe, hat mich ersucht, Eure Excellenz zu bitten, Seiner Majestät seinen tiefgefühlten und ehrfurchtsvollen Dank für die ihm gnädigst verliehene hohe Auszeichnung gefälligst zum Ausdruck bringen zu wollen.

Indem ich diesem Wunsche Folge leiste und mich beehre auch meinerseits meine Gefühle lebhafter Freude und Genugthuung anläßlich der einem Deutschen Reichsangehörigen erwiesenen Ehre auszusprechen, benutze ich diesen Anlaß Eurer Excellenz die Versicherung meiner ausgezeichneten Hochachtung zu erneuern.

H. Weipert



에케르트는 작곡가인 동시에 오보에 연주자로서 독일의 프러시아 왕국의 궁정악장을 역임한 바 있는 드레스덴음악학교 출신의 유능한 음악인이었다. 게다가 에케르트는 이미 일본에서 군악대를 지휘한 경험까지 갖추고 있어, 그의 탁월한 지도력에 힘입은 서양식 군악대는 매우 빠른 성장을 보였다.

그들은 군의 의식은 물론 정부의 각종 의식에서 음악을 담당하였고, 이 밖에 시민을 위한 연주회를 파고다공원에서 갖는 등 서양의 군악 및 국가·국민가요, 서구의 행진곡 등을 우리 나라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약 10여년간 의욕적인 활동을 벌여온 서양식 군악대는 1910년 경술국치와 동시에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로 개편되었다.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고,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기구로 이왕직(李王職)과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이왕직(李王職)은 기존의 대한제국황실업무를 전담하던 궁내부를 계승한 것으로서, 이 기구는 조선총독부가 아닌 일본의 궁내성에 소속되었다.
물론 조선총독부는 일반 국정업무를 전담하던 의정부(후의 내각)의 모든 기능과 업무를 접수하여, 식민지기간 내내 조선을 지배하던 최고기구였다. ]
에케르트가 죽은(1916) 뒤 백우용(白禹鏞)이 그 뒤를 이어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왕직양악대는 해체되고, 1919년 경성양악대로 계승되었으나 결국 변화를 겪으면서 해산되고 말았다.
비록 이들의 활동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으나, 서양식 양악대의 설립 및 그들의 활동이 초창기 서양음악 수용에 미친 영향은 이를 모체로 한 민간에서의 양악활동이 그 영역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조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백우용 (白禹鏞, 1880~1950) /요약

한국 최초의 군악대원·지휘자.

활동분야 예술
주요작품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 《기려강안도(騎驢江岸圖)》

본문

외국어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한말 군악대장이었던 F.에케르트 밑에서 음악을 공부하였다. 그후 한일군악대를 지휘하고 단성사(團成社)의 전속 관현악단 악장(樂長)을 지내기도 하였다. 1916년 스승이 사망하자 군악대를 인수받아 1924년 해산될 때까지 지휘하였다.


양악대(洋樂隊)의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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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 조약이 공포된 1910년 8월 29일 장예원(掌禮院) 악사장 훈6등 백우용(白禹鏞)은 특승(特陞)되어 훈5등에 서훈(**勳)되었다.
특승이란 말이 뜻하듯이 왕조(王朝) 최후의 날에 그 동안의 공적을 인정하여 특별한 상훈에 올렸다는 것인데, 그만큼 백우용의 왕가에 대한 봉사가 각별하였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악에 대한 예우는 깍듯이 하면서도 고유의 국악에 대한 이해는 희박했다는 반증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융희원년(隆熙元年)(1907) 9월 1일자의 포달(布達) 제160호로 군부소관 군악대를 혁파하고 그 대원들로 제실악대(帝室樂隊)를 조직하는 규정이 반포되었다.[註7] 군악대 폐지에 관한 일은 그해 9월 4일에 내린 칙령 제20호로 군부소관 군악대 이하 관제 및 규정폐지건이 재가(裁可) 반포되므로서 한국개화의 선봉적 역할을 담당했던 군악대는 창설된지 8년만에[註8] 해산되고 동 대원들로 편성된 제실양악대가 유지되다가 1910년 후에는 이왕직양악대로 계속 잔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15년에는 이왕직(李王職)의 직제(職制)가 고쳐져 6과로 사무가 분장(分掌)되었는데 양악대는 장시사(掌侍司)에 속하고 아악대는 제사과(祭祀課)에 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년 5월 고용원 중 양악대의 정원은 다음의 <표:양악대의 구성과 급료>와 같다.[註9]
양악대의 직종, 정원 및 그 보수가 아악대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고 균등하게 책정되어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하여 1916년 1월에는 군악대와 제실악대 편성에 공이 큰 이왕직 양악대의 음악교사 독일인「에케르트」가 만기로 해임되어 왕실에서는 위로금으로 50원, 귀국여비금으로 900원, 기념품비로 500원을 하사하여 그의 다년간의 노고를 치하하였다.[註10] 그러나 「에케르트」는 이 해 8월에 귀국도 하지 못하고 한국에서 타계하니 순종(純宗)은 100원을 하사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註11] 이때 「에케르트」는 이미 양악대를 고용만기로 사면하고 무관한 관계에 있었지만 그의 사망 후 이왕직 양악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한국개화의 상징처럼 설치되었던 양악대의 대원이었던 이윤용 · 백우용을 비롯하여 초창기부터 악기와 음악에 생명을 바치기로 작정했던 모든 대원들은 나라와 군대를 잃고 마지막으로 남은 음악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나라없는 그들에게 있어서 이 양악대는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註12]
이왕직으로부터 해산된 양악대는 민간자영단체로 경성악대를 만들어 사력을 다하였으나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염출할 방도가 없어 1920년경에 스스로 와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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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무렵부터는 윤치호 작사의 애국가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윤치호는 여러 애국가를 참작해 다듬어 작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사는 “우리 대한만세” “바람 이슬 불변함은” 등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애국가 가사와 거의 일치한다.

윤치호 작사의 가사 첫 구절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이다.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도록 전지전능한 하나님에게 보호해 달라고 소구(訴求)하는 내용이다.

이어 ‘화려강산’을 보존하고 ‘남산의 소나무’를 우리 기상으로 삼고 ‘가을 하늘’과 ‘밝은 달’ 따위 자연 현상을 빌려 ‘일편단심’의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뜻을 담았다. 첫 구절부터 동해물이 넘치고 백두산이 솟구쳐 오른다는 기상과는 동떨어진다. 마르고 닳는 퇴영적 소구일 뿐이다. 하나님에게 의타적 소구를 통해 나라를 보호하자고 했다. 인간의 의지는 온데 간데 없다.

이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보이는 ‘하늘님’인지 기독교에서 받드는 창조주 하느님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는 열렬한 감리교도로 기독교적 인생관이 형성된 사람이 아니었던가?

다음 자연 현상의 용어들을 사용해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무시되었다. 열강의 식민지 경영으로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한 현실에 대한 자기 각성과 타개의 용어들이 사라졌다. 그저 막연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라고 촉구한 것이다. 인간이 실종되었으며 자주와 독립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인권사상과 평등사상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한’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제국을 의미한다. 대한제국은 주권 재민의 국민국가가 아닌 전주군주를 추구한 왕조의 연장이었다.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했으나 그 정체는 국민국가를 지향했다는 점이 달랐다.

아무튼 삼일운동 당시 우리의 강산에는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였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와 지사들은 태극기를 내걸고 애국가를 부르며 나라 찾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 호소력과 전파력은 몇 만개의 총칼보다 위력을 발휘했다.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는 예전의 태극기와 애국가를 별 생각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사려가 깊지 못했다. 더욱이 애국가의 가사는 물론 그 곡조도 배재학당의 애국가 곡조(오늘날은 안익태 작곡을 사용)를 그대로 사용했다. 민족의식과 민주가치를 너무나 소홀하게 다뤘다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 작사자 윤치호 역시 교활한 친일파로 부귀를 누리고 살았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이 대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욱이 친일부역배 진상규명을 위한 법에 따라 이 두 사람도 그 조사 대상에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들의 행적이 제대로 밝혀지면 태극기와 애국가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여기 어설픈 한 역사학자는 이 대목에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이화/ 역사학자〉

- 박영효와 윤치호는 누구? -

박영효(1861~1939)는 철종의 부마(사위)로 많은 특혜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초기에는 개화파의 주요 멤버로 꺼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충만했다.

갑신정변에 앞장 섰으며 독립협회의 주역으로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다. 개혁을 선도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모방하고 일본의 힘을 빌리려는 방법적 모순을 저질렀다.

일제식민지 지배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합병에 공로가 있다고 하여 후작(侯爵)과 많은 은사금을 받았다. 또 조선총독부 정책을 자문하는 중추원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조선 사람으로는 드물게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는 삼일운동의 33인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친일단체의 모임에는 거의 빠짐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많은 재산을 끌어안고 일본 사람들과 어울려 파티를 벌이거나 요정을 출입하면서 살았다.

윤치호(1865~1945)는 박영효보다 더 기교를 부리며 살았다. 젊은 나이에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미국을 시찰하기도 하고 미국 공사의 통역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드물게 영어 회화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도 학부협판(교육부 차관격) 등 여러 벼슬을 하면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하고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 독립협회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정치·민권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05인 사건, 곧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안창호 등이 신민회를 결성하여 민족운동을 벌일 때 여기에 가담했다 하여 10년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이때까지도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실력양성운동을 펴는 온건론자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땅 한 뙈기라도 사는 것이 실력”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외의 여러 민족운동을 부정하는 말이나 같았다. 교묘한 화법이었다. 이런 그의 현실관과 행동방식은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내는 따위로 식민지 정책에 협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는 해방을 맞고 나서 죽었다. 죽음을 두고 말이 많았다. 친일파로 규탄을 받자 고민 끝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주변 사람들이 지어냈다는 설이 유력하게 떠돌았다. 열렬한 감리교인인 그가 자살을 죄악시하는 교리를 어길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친일행각을 희석시키려는 잔꾀를 부렸다는 뜻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니 무엇이 진실인지 모를 일이다.

덧글

  • 애국가 2019/01/15 02:10 # 삭제 답글


    한겨레

    "친일 넘어 친나치 '안익태의 애국가' 이대로 둘 것인가"

    입력 2019.01.14. 20:56 수정 2019.01.14. 22:16 댓글 3923개

    [짬]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이해영 교수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가 친일파이자 친나치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이해영 한신대 교수.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가 친일파이자 친나치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이해영 한신대 교수.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1906~65)의 친일행적은 10여년 전부터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가 친일파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어떨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미국산 소고기 투쟁,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정치학자로서 개입해온 이해영(사진)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가 이번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의 전력’을 파고들었다.

    이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삼인)는 지난 8년 남짓 직접 발굴한 최신 자료들을 종합해 그동안 알려진 일본명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만이 아니라 친나치 활동까지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지난 1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 연구’ 출간
    8년간 독연방문서보관서 등 자료 수집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 등
    2차 대전 2년반 ‘나치독일 행적’ 추적
    “유럽첩보 총책 에하라의 특수공작원”

    정부 나서 ‘안익태 파일’ 등 검증 필요
    “국회에서 ‘새 국가 제정’ 공론화 계획”

    1942년 2월3일 열릴 나치 정권의 전쟁 부상자와 가족을 돕기 위한 자선 기금 연주회를 앞두고 안익태(오른쪽)가 지휘할 <일본 축전곡>에 대해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왼쪽)와 상의하는 모습. 촬영 일시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베를린 연방문서보관소, 삼인 제공
    1942년 2월3일 열릴 나치 정권의 전쟁 부상자와 가족을 돕기 위한 자선 기금 연주회를 앞두고 안익태(오른쪽)가 지휘할 <일본 축전곡>에 대해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왼쪽)와 상의하는 모습. 촬영 일시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 베를린 연방문서보관소, 삼인 제공
    그 자신 안익태의 주 활동무대였던 독일에서 유학했고, 클래식 음악과 오디오 애호가이기도 한 이 교수는 논쟁적 정치학자답게 안익태 문제에 대한 기존 음악계의 학문적 접근보다 주장이 선명하다.

    안익태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35년께 미국에서 ‘애국가’를 초연할 때만해도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돕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안익태가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였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유럽지역 자국민 소개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대로 귀국하게 되면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오기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안익태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안익태는 1941~44년까지 만 2년 반 동안 에하라의 베를린 자택에 머물 수 있었다. 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그는 동맹국(독일·이탈리아 등)과 점령국(프랑스),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차례의 공연을 지휘한다.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 <만주국 환상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등도 연주했다. 특히 그는 나치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됐다. 그 회원증에서 그는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속여서 적기도 했다. 이 교수는 “안익태는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엔 약한 민족주의 성향마저 탈색되면서 적극적인 친일로 전향했는데, 본래부터 음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안익태가 지휘한 여러 공연이 ‘독-일협회’의 주최와 기획으로 열렸다는 데 주목한다. 독일과 일본의 민간 친교·학술 교류단체였던 독-일협회는 나치의 제정 지원을 받는 당 외곽 조직이자 두 나라의 대외 선전도구 구실을 했다.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페스티 비가도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이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있다. 삼인 제공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페스티 비가도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이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있다. 삼인 제공
    이런 점들을 종합했을 때, 이 교수는 안익태를 에하라의 ‘특수공작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안익태는 미리 일본의 첩보를 입수한 듯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의 우방국이자 파시스트 프랑코가 집권하던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에서 ‘기피 인물’로 지정된 안익태는 파리는 물론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는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이 또한 그의 친나치 활동을 방증한다.

    그동안 직접 독일 연방문서보관서를 드나들며 ‘안익태 파일’ 등 자료를 복사해왔던 이 교수는 정부 차원에서 추가로 기록과 자료를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안익태 행적 관련 사실관계가 70% 정도밖에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정부에서 정식으로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에 있는 안익태 파일을 복사해오고, 영상 자료도 사본을 확보해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자료가 있는지도 조회를 요청하는 등 정부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표적인 프랑스의 나치 부역 신문인 <르 마탕> 1944년 4월 19일치에 실린 사진. 전날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에서 에키타이 안(오른쪽)은 유명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왼쪽)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협연했다. 삼인 제공
    대표적인 프랑스의 나치 부역 신문인 <르 마탕> 1944년 4월 19일치에 실린 사진. 전날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에서 에키타이 안(오른쪽)은 유명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왼쪽)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협연했다. 삼인 제공
    안익태의 ‘애국가’가 관행상 ‘국가’로 불려왔지만, 현재 법적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없다. 그래서 1960~70년대에도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하자는 운동이 있었고, 전두환 정권 때에도 ‘국가 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애국가의 가사와 감상적인 곡조의 문제점을 들어 새 국가를 만들려고 했었다. 즉,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문제는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 필요성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60년 넘게 안익태의 유럽 행적이 은폐된 상황에서 그나마 친일 문제가 터진 것도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지금도 서점에선 여러 종의 ‘안익태 위인전’이 유통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 나치 부역만으로도 프랑스에서는 사형감이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 미국 등에서도 비열한 부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부르는 상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교수는 새로운 ‘국가’ 제정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해 공론화해볼 계획이다. “국가는 가장 중요한 나라의 상징체계 가운데 하나로,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핵심적인 제의적 절차다. 그런데 비애국적인 국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런 문제를 과연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애국가’ 같은 기본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제는 답변해야 한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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