瑞山君派譜 * 뿌리 프로필



  1. 讓寧大君      褆(제)   

                                  * 順城君
                                  * 咸陽君
                                  * 瑞山君       외 7남 15녀  
                                  
  2. 瑞山君         譓(혜)  양녕대군의 3남

                                  * 鶴林君
                                  * 鷲城君   

  3. 鷲城君         頻(빈)  * 전주 이씨 영풍군파(永豊君派)의  2세 繼子가 되어 제를 지냄 . 





永豊君  전(瑔)

세종대왕의 8남으로 1434년(세종 16) 8월에 문혜대빈(文惠大嬪) 청주양씨(淸州楊氏)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1441년(세종 23) 7월에 세손(후의 단종)이 태어났으나 얼마 되지 않아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승하하니 혜빈 양씨가 유모가 되어 양육하였다.

1452년(문종 2)에 단종대왕이 왕위에 오를 때 단종은 보령 12세였는데 재위 3년, 상왕위 2년만에 참화가 발생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후에 성삼문 · 박팽년 등의 사육신이 몰래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였는데 영풍군이 참여하였다가 모의가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사육신과 공의 모자가 동시에 화를 입어 함께 순충사절(殉忠死節)하였다. 1456년이었으며 공의 나이 23세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없어졌고 사위(祠位)는 수진궁(壽進宮)에 있었으나 자손이 잔약하여 향사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때에 신원되어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고 1791년(정조 15) 2월에 `정렬(貞烈)'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현록대부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라는 품계가 내려졌다.

배위는 군부인 순천박씨로 이조판서 박팽년의 딸이다. 1녀를 낳아 만호(萬戶) 이양손(李陽孫)에게 혼인시켰으나 공을 따라 함께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동면에 있다 하나 미상이다. 계자에 양녕대군 손자 취성군(鷲城君) 빈(頻) · 계림군(鷄林君) 탄(坦) · 하계군(河溪君) 진(瑱)이 있는데 이들은 아들 · 손자 · 증손으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나머지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없다. 전해져 오던 문헌들은 여러 번의 병란을 겪으며 모두 소실되었고 남은 것은 단종 때의 기록 몇 가지 뿐이라, 공의 모자가 함께 희생되었던 충절은 알려지지 않았다. 공의 15대손 근식(根植)이 더 오래 지나면 모든 것이 민몰될까 두려워 그 아들 영진(榮珍)에게 명하여 [장덕문(狀德文)]을 종인(鍾仁)에게 보이게 하니, “돌이켜보면 부박하고 천박한 필치로 어찌 감히 감당하리오. 굳이 사양하다가 피하지 못하고 이제 공의 덕을 발휘코자 한 즉 세대가 침원(浸遠)한지라 공의 풍렬(風烈)에는 미치지 못하겠으나 그 대개를 들어 장의(狀儀)를 조성하여 후세에 남기노라.”고 하였다.

그 후 중종대왕은 특명으로 “양녕대군의 증손 계림군의 차남인 하계군으로 봉사하라.” 하였다. 1872년(고종 9)에는 공의 적중증손(嫡衆曾孫)에게 봉작 · 봉군(奉君)하여 승전(承傳)케 하였다.

고종태황제 갑자보(甲子譜)에 특명으로 계양군파(桂陽君派) 10대손 정화(正華)로 하여금 봉사케 하였으나 그 후 후손이 잠적, 궐사하므로 전남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이성산(尼城山)하에 모신 영풍군의 후손이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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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양군(桂陽君.1427∼1464)

    (1) 세종대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빈 김씨다. 신빈 김씨는 내자시 소속의 공노비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궁녀로 선발돼 중전 소헌왕후 심씨의 지밀 나인이 된다.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한 소헌왕후를 모시며 슬픔에 빠진 심씨를 위로하다 젊은 임금 세종과 사랑에 빠졌다.
  결국 세종의 후궁이 된 신빈 김씨는 계양군(증), 의창군(공), 밀성군(침), 익현군(관), 영해군(당), 담양군(거) 등 아들 여섯과 딸 둘을 낳았다. 12년 동안 아이를 여덟이나 낳은 신빈 김씨는 조선 시대의 후궁들 중에서 두번째로 아들을 많이 낳았다.
  신빈 김씨는 중전인 소헌왕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소헌왕후가 막내아들 영웅대군의 양육을 신빈 김씨에게 맡겼을 정도다. 신빈 김씨는 세종이 죽자 머리를 깎고 불가에 귀의한 뒤 절에서 여생을 보내다 세조 10년(1464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계양군의 부인은 좌의정 한확(韓確:1403∼1456)의 딸이다. 한확은 세조의 장남 도원군(후에 덕종)과는 동서 사이로, 세조와 가까웠다. 계양군은 영원군(寧原君)·강양군(江陽君)·부림군(富林君)·방산수(方山守)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차남 강양군은 막내 숙부 담양군에게 양자로 갔다. 장남 영원군은 아들이 없어 셋째 아우 부림군의 차남 도안군(道安君)을 양자로 맞이했다. 도안군이 문천정(文川正)과 평양령(平陽令)을 낳아 큰 집을 이루었다.
  부림군의 장남 회안부정(淮安副正)은 외아들 덕양부수(德陽副守)를 두었고 덕양부수는 말손(末孫)·희손(希孫) 등 두 아들을 두었으나 손자 대에서 무후(無后)했다.
  방산수는 당대에서 후사가 없어 후손이 끊겼다. 도안군의 차남 평양령도 후손이 없어 결국 문천정 손만이 퍼져 나갔다.
 
                                                   기사입력: 2008/08/06 [17:56]  최종편집: ⓒ 전북매일신문


   (2) 이름은 증(璔). 자는 현지(顯之). 아버지는 세종이고, 어머니는 신빈김씨(愼嬪金氏)이며, 부인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계양군에 봉하여졌다. 아버지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도 잘 썼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뒤 한명회(韓明澮)·한확 등과 함께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어, 계유정난을 도왔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정되었다.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의 출납을 맡아 신임을 얻었다.

남을 대접함이 겸손하여 권세를 부리지 않았으나, 주색에 빠져 일찍 죽었다.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자가 현지(顯之)로 세종대왕의 2남이다.

  (3) 어머니는 신빈(愼嬪) 김씨이다. 신빈 김씨는 계양군을 비롯하여 의창군(義昌君) · 밀성군(密城君) · 익현군(翼峴君) · 영해군(寧海君) · 담양군(潭陽君) 등 여섯 아들을 낳았다. 계양군이 신빈 김씨의 장남이다. 계양군의 배위는 좌의정 한확(韓確 : 1403∼1456)의 딸로 세조의 장남 도원군(桃源君 : 後의 德宗)과는 동서(同챢)의 사이로, 세조대왕과 가까웠다. 아버지 세종대왕의 총애가 지극했으며 학문을 즐기고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세조대왕이 즉위하는데 한 몫을 했으며, 그 공으로 1455년(세조 1) 좌익공신(左翼功臣) 1등이 된 후로부터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庶務)의 출납을 맡아 신임을 얻었으며 1460년(세조 6) 세자가 혼인할 때 가례도감(嘉禮都監) 제조(提調)를 겸했었다.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계양군은 영원군(寧原君) · 강양군(江陽君) · 부림군(富林君) · 방산수(方山守) 네 아들을 두었는데 차남 강양군은 막내 숙부 담양군에게 양자로 갔다. 장남 영원군은 아들이 없어 셋째 아우 부림군의 차남 도안군(道安君)을 양자로 맞이했다. 이 도안군이 문천정(文川正)과 평양령(平陽令)을 낳아 큰 집을 이루었다. 그리고 부림군의 장남 회안부정(淮安副正)은 외아들 덕양부수(德陽副守)를 두었고 덕양부수는 말손(末孫) · 희손(希孫) 두 아들을 두었으나 손자대에서 무후(無后)했다. 또 방산수는 당대에서 후사가 없어 후손이 끊겼다. 그리고 도안군의 차남 평양령도 후손이 없어 결국 문천정 손만이 퍼져 나갔다.   -대동종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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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풍군 게속...
 
  배위는 군부인 순천박씨로 묘역은 충북 충주시에 있다 하였으나 찾을 길이 없던 중, <이화보>를 통하여 충북 중원군 기준(基俊) 분원장의 희첩(喜牒)을 통하여 묘소를 발견하였다. 누차에 걸쳐 왕래하다가 1991년 3월에 비 · 지석 · 망주석 · 장군석 일체를 전남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이성산하에 모시고 또한 설단하였다.

또한 영풍군 이하 15대손의 묘를 한 묘역 안에 모셔 재각을 건립하였다. 그 재각의 명칭을 영모재(永慕齋)라 하고 종합묘비를 건립하여 봉향하고 있다.

영풍군의 2세는 취성군 빈이요, 배위는 현부인(縣夫人) 성주이씨이다. 3세는 계림군 탄이며 배위는 현부인 교하노씨이며, 4세는 하계군 진으로 배위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여흥민씨이다.

5세는 덕령(德齡)이요, 배위는 증 숙부인(叔夫人) 파평윤씨이다. 6세는 장길(長吉)이요, 호는 어은(漁隱)인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행(行) 전의현감(全義縣監)을 지냈고 광해군 때에 해불(解쯮)로 남하하였다. 배위는 숙부인 하동정씨이다.



  4. 鷄林君         坦(탄) 
                                  * 璘(린)
                                  * 瑱(진)  河溪君
                                  * 搪(당)

  5.                   璘(린)                       吏曹判書

                                  * 元友(원우)
                                  * 元忠(원충)

  6.                 元忠(원충)                    中司馬

                                   * 軫(진)
                                   * 軼(질)

  7.                   軼(질)
                                   * 義男(의남)
                                   * 禮楨(예정)

  8.                 義男(의남)

  9.                 信民(신민)

                                    * 日成(일성)
                                    * 萬成(만성)

10.                  日成(일성)

                                    * 益柱(익주) * 益健(익건) * 益潤 * 益鳳 * 益唐 * 益泰 * 益載

11.                  益健(익건)

                                    
12.                  好大(호대)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 옥호리 734-1     宗山



  
                                     * 得喆 * 得寬 *得晩

13,                  得晩(득만)


14.                  榮(담영)


                                      * 奎鳳 * 奎鸞(규란)


15.                  奎鸞(규란)

                                      * 時善 * 尙善

16.                  時善(시선)  일명 在天(재천)   고종 8년 신미(1871년) 7월 14일생, 신미 2월 27일졸

                                       * 承會 일명 聖玉 * 承卨 * 承根

17.                  承卨(승설)  일명 聖龍(성룡)  1903년 계유 4월 23일생, 1945년 을유 12월 12일졸

       
                                     * 義秀  *  漢秀(한국전쟁중 중국군으로 참전 사망)  * 吉秀
                                                                                                        19.  春元  春虎  春玉  春姬


18.                  義秀       1927년 정묘 12월 14일생, 1998년 11월 13일(음)졸

                                    
                                      * 丙鎬 * 丙烈(일명 昌烈) * 丙權(일명 忠權) * 丙周 * 丙熙

19.                  丙鎬

                                      * 尙潤 * 炫承(일명 炫基)

20.                  尙潤(일명 潤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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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왕위를 양보한건가(8)

양녕대군은 여전히 단골 탄핵대상이었지만 세종은 언제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양녕을 탄핵한 자가 의금부에 하옥당하여 국문을 받는 일도 있을 정도였으니, 양녕을 청주까지 보내야했던 초기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마침내 재위 20년째인 1438년, 양녕을 서울집에 살도록 허락하였다. 신하들은 당연히 반대하였지만 당연히 소용없었다.

이 망나니 왕자 양녕대군에게는 이혜(李譿)라는 아들도 있었다. 세종은 재위 17년째인 1435년, 이혜를 가정 대부(嘉靖大夫) 서산군(瑞山君)으로 봉한다. 순성군 이개의 책봉에는 반대하던 신하들도 이 정도는 체념을 한 건지 별 반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4년 후, 세종의 명으로 '석방'되었다. 즉 무슨 죄를 지었다는 소리인데, 실록에는 무슨 죄인지 전하진 않는다. 하지만 석방 다음해에 서산군의 고신을 돌려주는 걸 보면 그가 지은 죄는 고신을 빼앗길 정도로 큰 죄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고신을 돌려받고도 그는 별 반성이 없었는지, 작위가 서산군에서 황계령(黃溪令)으로깍이고 만다.
그러나 이혜는 이보다 더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세종 29년인 1447년,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만 것이다. 아무리 술 마시고 저지른 일이라도 범죄는 범죄. 이일로 종부시에서 이혜를 탄핵하니, 여기에 따라 세종은 이혜의 직첩을 거두어 서산 윤(瑞山尹)으로 하고, 고성에 안치한다. 그리고 밭과 집을 주어 살게 하되 사냥과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종부시에 “서산 윤(瑞山尹) 혜(譿)에게 술을 마시게 한 자는 제서유위(制書有違)로 논죄하고, 술마시는 것을 보고 아뢰지 아니한 자는 응주불주(應奏不奏)로 논죄하겠다. ”라고 전교하여, 이혜의 음주를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서산윤 이혜는 왜 이렇게 망나니짓을 하였을까? 부전자전이었던 것일까? 정확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실록의 한 기사에는 이혜가 망가진 계기가 나온다.

혜(譿)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에게 빼앗기고 심화병을 얻어, 술김에 자주 사람을 죽인 까닭에,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랬다. 양녕의 애정행각은 급기야 아들의 여자까지 넘보면서 아들을 제대로 폐인으로 만들고야 만 것이다. 물론 "엉엉, 아버지가 내 여자를 뺏었어,", "그냥 술에 취해가지고..."라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 게 용서받을 수야 없다. 하지만 이건 제3자의 입장에서 하는 얘기고, 어쨋거나 아들이 빗나가는 계기를 제공한 양녕의 여자밝히기는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하겠다.

이혜가 유배된 이듬해에는 부자들이 세트로 세종의 주름살을 늘리려고 작정을 했는지, 순성군 이개가 진주로 휴가를 갔다가 기한 내에 돌아오지 않아서 종부시의 탄핵을 받았다. 세종은 이 요청에 순성군의 파직하였지만, 종부시와 사헌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순성군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종은“개는 사리(事理)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과오로 저지른 것을 구태여 논할 것이 없다. 또 아우인 이혜(李譿)가 죄를 받아 이미 먼 곳에 귀양가 있는데, 이제 또 개를 죄주는 것은 내 차마 할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서기 1450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비롯한 수많은 업적과 그 업적으로 기틀이 다져진 국가 조선, 병든 장남과 어린 장손, 야심 많은 차남, 그리고 망나니 형을 남기고 승하하였다. 이어 세자가 즉위하니 문종이다.
출처:瑞山君派譜 * 뿌리


왕이 바꾸었지만 사람을 죽이고 유배까지 갔던 이혜는 실록에 기술된대로 정말 미친건지, 아버지가 하던 짓을 더욱 발전시켜서 계승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할아버지 태종이 느꼈던 심정을 알려주고 싶었는지 몰래 도망쳐 양녕이 사람을 보내 찾은 일도 있었다. 양녕은 세종 초기 가출했다가 하룻만에 돌아왔지만, 이혜는 아버지보다 통이 크게 금강산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런가 하면 손수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된다고 하다가, 노비를 죽인 일도 있고 하여 결국 문종은 즉위한 그 해에 이 골치 아픈 사촌을 가족들과 함께 강화도로 안치시켰다.

하지만 이듬해인 1451년 2월, 이혜는 강화도에서도 여종을 쇠못으로 찌르고 집에 불을 질러 도망치는 사고를 친다. 하지만 강화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잡혀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아들을 쇠못으로 찌른다. 이쯤되면 이혜가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던 거 같다.

문종은 의정부 대신들과 의논하여 의원을 보내 이혜를 치료하는 한편, 식사는 밖에서 제공하고 불의 사용을 엄금하며 가족과도 격리시키도록 명령한다. 그 시대에 정신병원만 없었을 뿐이지, 정신이상으로 격리 수용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리고 큰아버지 양녕을 이혜에게 보내기로 한다.

그 해 4월 7일에는 이혜의 고신을 돌려주었으나, 이혜는 고신을 돌려받은 바로 다음날,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한다. 곧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지만 이미 그가 기절한 후였고 이틀 후 결국 숨을 거둔다.

이혜가 결국 자살을 한 걸로 보면 문종이 큰아버지 양녕을 보냈던 것은 별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이혜가 삐뚤어진 계기를 제공한 장본인이 양녕인데, 더 미치면 더 미쳤지 제 정신으로 돌아오기는 힘들 거 같다. 이렇게 양녕의 애정행각은 자기 아들 마저 파멸로 몰고 갔다.


# by 을파소 | 2008/03/11 21:55 | 을파소의 역사이야기 | 트랙백 | 핑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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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瑞山君派譜 * 뿌리

 
 서산군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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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군 이혜 묘소 (왼쪽이 서산군, 오른쪽은 군부인 김씨 묘소)

서산군 이혜(瑞山君 李譿, ? - 1451410)은 조선시대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손자이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적 3남이다. 세종대왕의 조카이다. 정효전 등과 기생을 놓고 다투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된 바 있고, 이름은 혜(譿),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 뒤 음주후 구타, 살인을 했고 몰래 탈출하는 등의 물의를 빚었는데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겼다 한다. 1451(문종 1) 유배지에서 자결 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목차 [숨기기]

1 생애

1.1 생애 초반

1.2 파직과 복직

1.3 생애 후반

2 가족 관계

3 울화병의 원인

4 주석

5 관련 항목

6 참고 문헌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조선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휘는 혜(譿)이다. 태종의 손자이며, 세종, 효령대군 이보, 성녕대군 이종의 친 조카이다. 아버지는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褆)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증 좌의정 광산군 김한로(光山君 金漢老)의 딸로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 金氏)이다. 부인은 안산김씨(安山金氏) 안산군 김개(安山君 金漑)의 딸로 양천군부인 김씨(陽川郡夫人 金氏)이다.

 

양녕대군의 1017녀 중 적 3남으로 탄생하여 관례를 올리고 안산김씨 판중추원사 안산군 김개(安山君 金漑)의 딸 안산김씨(安山金氏)와 결혼하였다. 1435(세종 17) 416일 가정대부(嘉靖大夫, 2)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되었다. 그의 형 순성군 이개를 군으로 책봉하는 것을 두고 일부 신하들은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순성군 이개의 책봉에는 극렬 반대하면서도 이혜의 봉작에는 반발하지 않았다.

 

파직과 복직[편집]

그러나 1438(세종 20) 519일 금지된 단오날에 석척희(石擲戲)를 범하여 탄핵을 받고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되돌아왔으며, 이해 123일 다시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되었다.

 

1439(세종 21) 120일 종묘제를 서계(誓戒)한 후에 영돈녕부사 권홍(權弘)의 집에 모이어 기생 소지홍(小枝紅)과 김규월(金閨月) 등을 불러서 술 마시고,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과 한 기생 소지홍과 간통하고, 그 뒤 정효전과 서로 한 기생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다가 탄핵당하였다.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을 상하게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1440(세종 22) 42일 다시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되었다가 144471일 종2품 중의대부(中義大夫) 서산윤(西山尹)으로 변경되었다.[1] 그 뒤 사람을 상하게 한 일로 황계령(黃溪令)으로 강등 되었다.[2]

 

생애 후반[편집]

1447(세종 29) 103일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여 종부시(宗簿寺)에서 그 죄를 청하여 세종이 명하길, "직첩을 거두어 고성현(固城縣)에 안치(安置)하고 인하여 그 도 감사에게 일러서 밭과 집을 주게 하고, 또 활과 살을 가지고 나가서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또 바깥 사람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의 붕어 직후 몰래 도망쳐 양녕대군은 사람을 보내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혜는 금강산에 입산해 오랫동안 은신해있다가 되돌아왔다.

 

관직은 중의대부(2)에 이르렀고 별세하자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에 예장하였다. 사후 복권되어 서산군(瑞山君)에 봉작받고, 1품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추증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아버지 :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褆, 1394- 1462)

어머니 : 수성부부인 김씨(隨城府夫人 金氏, ? - ?), 광산인(光山人) 증 좌의정 광산군 의 딸.

부인 : 양천 군부인(陽川郡夫人 金氏, ? - 146465), 안산인(安山人) 판중추부사 안산군 김개(安山君 金漑, 14051484)의 딸[3][4].

장남 : 학림군 이이(鶴林君 李頤, ? - ?)

2: 취성군 이빈(鷲城君 李頻, ? - ?)

외할아버지 김한로(金漢老, 광산군(光山君), 1367- ?)

처부 : 김개(金漑, 안산군(安山君), 14051484)

울화병의 원인[편집]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의 세종 32년의 기사에 의하면 그의 사고 원인에 대해 아버지 양녕대군이 그의 첩을 빼앗았기 때문이라 기록하였다. 그에 의하면 '(譿)는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에게 빼앗기고 심화병을 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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