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육군사관학교 역사속으로



육군사관학교는 1946년 5월 1일 "태릉"에서 개교하였으며 6.25전쟁으로 임시 휴교하였으나 전쟁의 와중에서도 군의 백년대계를 위한 노력은 지속되어 1951년 10월 31일 경남 진해에서 4년제 정규사관학교로 재개교하였다.
휴전 직후인 1954년 6월 23일 현재의 위치로 복귀하여 옛 화랑의 얼과 정신을 이어받고자 '화랑대'로 명명하였다.

육사는 세계화, 정보화의 21세기를 맞아 미래지향적인 교육제도와 신세대에게 맞는 훈육 체계를 정립하고 초현대식 교육시설과 환경을 구비하여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탁월한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1998년 3월 2일에는 개교이래 여생도(58기)가 최초로 입교함으로 금녀지대로서의 성역을 깨고 여성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한편, 2008년 3월 11일 제 64기생이 졸업함으로써 현재까지 1만 8천여명이 배출되었으며, 그중 9%에 달하는 1,620여명이 한국전쟁과 월남전 등 각종 전투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육군사관학교의 역사는 이미 반 세기가 넘었다. 1946년 5월 1일에 육군사관학교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조선경비사관학교(朝鮮警備士官學校)가 제1기생 88명으로 개교하였고, 2006년 5월 1일 개교 6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육사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45년 12월 5일에 문을 연 군사영어학교 (Military Language School)와도 관계가 깊다. 

1945년 11월 13일에 공표된 군정법령 제28호에 따라 건군 사업의 첫 발걸음으로 국방사령부가 설치된 뒤에 부각된 당면 과제는 군 간부 양성 문제였다. 사설 및 유사 군사단체와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경력을 쌓은 수많은 자원들이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군사적 배경과 경력을 가진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통일된 교육을 실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당시의 군 당국은 미국식 군사제도와 교리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후 우선적으로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 군정청(軍政廳)과의 원활한 협조에 필요한 위한 통역관을 양성하는 일이 시급했으며, 더 나아가서 장차의 국군 창설에 대비한 간부 요원의 확보도 필요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군사영어학교가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冷泉洞) 31번지의 감리교 신학교 자리에 문을 열게 되었다. 학교장 미군 리스(Rease) 소령, 부교장 원용덕(元容德) 참령 아래 한국과 미국 양국인으로 구성된 교관단이 편성되어 선발된 60명을 대상으로 영어, 국사, 참모사(參謀史), 자동차, 소화기(小火器) 과목 등을 교육하였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2월 27일 태릉으로 이전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의 창설과 더불어 폐교될 때까지 약 110명 (일본육사출신 12명, 학병출신 72명, 지원병출신 6명, 만주군출신18명, 중국군출신 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교육 기간이 한 달 남짓한 단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입교 이전의 군사 경력과 불타는 애국충정으로 모든 난제를 극복하고 군의 창건과 그 후의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군사영어학교가 해체된 이튿날인 1946년 5월 1일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하지 못한 학생 60명과 경비대 각 연대의 사병 중에서 2~3명씩 선발된 28명 등 모두 88명을 제1기생으로 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朝鮮警備士官學校)가 개교하였다.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의 개교 기념일이 5월 1일로 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초대 교장으로 이형근(李亨根) 참령이, 부교장과 교수부장 및 생도대장 으로 장창국(張昌國) 부위가 각각 취임하였다.

이 때부터 군사적 응용 과목에 대한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전술 훈련과 지휘 통솔법 과목을 보강하는 등 조선경비사관학교는 정규사관교육을 지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기 직전까지 배출된 제1기에서 제7기까지의 약 1천 8백여 명의 사관후보생들은 기별에 따라 최단 45일 부터 최장 6개월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 임관되었다.
이 기간 중 입교한 대부분의 사관후보생들은 과거에 군사 경력이 있던 사람들이거나 현역 장병 가운데 선발 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받은 짧은 교육 기간에 비해 교육 성과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제5기생과 제7기생은 민간인 출신이어서 신병교육훈련이 교육 기간의 반 이상 소요되어 교육기간이 6개월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이들 사관후보생은 모두가 불타는 애국충정과 건군의 초석이 되고자 하는 사명감넘쳐 며칠간의 교육에 해당하는 분량을 하루에 소화해 내는 성과를 보이기도 하였다.조선경비사관학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즉 1948년 9월 5일, 국군의 창설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면서 교육 기간이 다소 연장되었다.
실제로 제8기는 22주, 제9기는 23주의 교육훈련을 받았다.
교육 내용도 점차 내실을 기하게 되어 제식훈련, 화기훈련, 기본 전술훈련 외에 국사, 영어 등의 대학교육 비중도 점차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6개월에 이르는 교육훈련이라 할지라도 그 질은 객관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결코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따라 육군 당국에서는 교육과정을 4년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정규장교를 육성하자는 안을 구상한 후 이를 제10기생부터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에 제10기생 ,즉, 생도 1기는 2년제 과정으로 모집되었다. 하지만 입교 후에는 또 다시 1년제 과정으로 교육기간이 단축되었다.

이 무렵 경비사관학교로 모집되어 교육받고 있던 제7기와 육사로 개칭된 후의 제8기에는 특별반 제도가 있었다.
이는 그 당시까지 군에 입대하지 않고 있던 해외 군사경력자들을 입교시켜 단기간의 교육을 이수시킨 후 임관시키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였다. 

한편, 1950년 6월 1일 4년제 정규과정으로 생도 2기생이 입교하여 대망의 정규 사관학교 교육이 시작되는 듯 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전쟁 발발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에 임시 휴교 조치되었다. 졸업을 1주일 앞두고 있던 생도 1기와 4년 과정으로 입학한 지 20여 일 밖에 되지 않았던 생도 2기의 재교생들은 생도 신분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포천 부근의 부평리 전투를 비롯하여 갈매리 전투, 광나루 전투 등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격전을 치렀다.

생도 1기 중에서 전쟁 중에 살아남은 생도들은 1950년 7월 10일 대전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생도 2기는 같은 해 8월 15일 부산에 설치되었던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되어 종합 1기와 2기로 나뉘어 임관한 후 전선에 재투입되었다. 돌이켜 보면, 육사 60년사에 있어서 이들 두 기의 비운이야말로 너무나 뼈저린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6.25 한국전쟁으로 임시 휴교한 육군사관학교는 1951년 10월 31일 경상남도 진해에서 4년제 대학과정으로 재개교함에 따라 제11기 생도가 입교하여 육사의 전통을 다시금 계승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육사는 미국 육사를 모델로 하여 기구와 제도 편성하였기 때문에 교육제도는 물론 운영방식에 있어서 미국의 그것들과 유사하였다.

우선 이과(理科) 과목을 위주로 교육과정이 편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 육사의 테이어 제도(Thayer system)로 알려져 있던 교육방식 아래 일일시험(daily check-up), 장말시험(章末試驗), 그리고 기말시험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체계적인 평가 방식은 전쟁 중이라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 시행을 상상하기 어려운 제도로서 육사가 국내에서 가장 엄격한 학사제도를 운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치근무제도와 명예제도 등을 핵심으로 하는 생도의 내무생활도 자율적인 인격 도야는 물론 명예와 의무를 존중하며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초급장교를 양성하는 학교의 기틀이 되는 제도가 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재개교 당시는 여전히 전쟁 중이어서 교육 시설과 교보재 등은 여의치 않았다. 교사(校舍)는 진해 중학교 교실을 개조한 낡은 건물이었다. 교재는 일반대학에서 사용하던 자료들을 발췌하여 복사한 것들도 없지 않았다.
도서관, 실험실 및 기자재 등의 미비는 전쟁이라는 혼란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던 상황에서 정규 장교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국가 지도층은 물론 국민모두의 지대한 관심과 여망 속에 4년제 군사대학 과정으로 출발한 육사는 국방의 대임을 맡고 있는 육군의 요람으로 발전할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는 1953년 7월 휴전과 더불어 전선이 안정되자 이듬해 6월 21일에 태릉으로 복귀하여 새로운 교육환경을 정비하게 되었다. 교육시설의 확충, 교육제도의 개혁, 교육내용의 강화와 더불어 생도대 생활도 새롭게 변모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학교 설립의 법적 근거인 [사관학교 설치법]이 1955년 10월 1일에 국회를 통과하여 [법률 제374호]로 공포되면서 육군사관학교는 수업 연한이 
4년인 대학교육과정으로 인정받게 되어 졸업생에게는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수여하게 되었다.

서울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태릉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속하였으나,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오늘날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속해 있다. 태릉이란 지명의 유래는 을사사화, 을묘왜란, 임꺽정의 난 등 내우외환이 연이어 발발하여 온 나라가 소란했던 명종 (1545∼1567)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정은 지관(地官)이며 예언자였던 남사고(南師古)가 "동쪽에 태산을 봉한 뒤에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 라고 예언함에 따라 중종의 왕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능을 모신 후 태릉이라 명명하었다.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태릉은 서울의 동북 방면에서 시내로 향하는 주요 접근로를 감제할 수 있는  불암산과 수락산을 끼고 있어 군사작전상 요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일본군도 지원병훈련소를 이곳에 설치했고, 8.15 해방 후에는 국방경비대의 제1연대 "A"중대가 기존 시설을 활용하여 주둔한 바 있다.

태릉이 이렇듯 그 나름의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지만 1957년 3월 당시 교장이었던 백남권(白南權) 장군이 지명의 개칭을 논의 하였다. 국민의 여망을 담은 육군사관학교가 민족적 전통이나 화랑 후예의 기상을 닦는 국방의 요람지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화랑대」라는 명칭이 적합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를 계기로 화랑대에 자리한 육군사관학교는 명실공히 학교 임무와 시설, 그리고 환경이 육군의 요람이며 육사 졸업생의 고향으로 생각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연병장을 축조하고 가건물인 콘셋트 막사를 현대식 철근 막사로 바꾸며 학교의 환경을 일신해 나갔다. 1958년 5월 31일 새로 조성한 연병장을 "화랑연병장"으로 명명 했다. 동년 11월에는 각종 운동 경기가 가능한 18,000 여평 규모의 제3체련장 (구 "C" 연병장)이, 12월에는 주위의 전답을 매립하여 7,000 여평 규모의 축구 및 럭비 전용구장 (구 "F" 연병장) 등이 축조되었다.

수준 높은 일반학 교육을 위해 각종 실험실도 마련되었다. 1955년에는 200평 규모의 블록 연와조 건물로 강전 및 약전 실험실과 재실 및 교수실을 겸비한 전기공학 실험관이 준공되었다.

1957년 9월에는 역학실험실이 준공되어 수리공학(水理工學) 및 열공학(熱工學) 실험 등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국내에서는 최초의 실험실습장으로서 생도의 교육 환경과 교수의 연구 분위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58년 3월에는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전우들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미8군 장병들이 모금한 19만불($)로 건립한 단층 슬래브 도서관 건물이 개관되어 국내 최초로 개가식으로 운영되었다.
동년 6월에는 생도 내무반이, 그리고 12월에는 전 생도들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 준공되었고, 곧 이어 병원시설, 교육 지원부대인 근무지원단 막사, 성당 등이 순조롭게 건축되었다.


1961년에는 미군사 원조로 59석의 최신 어학실험실이 건립된 것을 비롯하여 1960년대 초부터 말기까지 실내체육관, 수영장, 군마장(軍馬場), 골프장, 양지관(養志館), 세탁소, 교회, 법당, 생도회관 등 현재 있는 거의 모든 시설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래의 건물을 보수하여 사용하던 종합교실 건물을 3층 철근 콘크리트 교사로 신축하면서 시청각 교실과 전산실, 어학실 및 교수실 등을 확충하였으며, 생도 모집인원의 증가에 발맞추어 생도 내무반을 새로이 증축하고 대강당을 완공하였다. 아울러 학교의 교직원들의 주거지인 관사와 아파트도 신축되었다.

                       
이처럼 육사가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제반 교육시설이 괄목할만한 수준에 이르게 되자 교육 환경과휴식 공간이라는 개념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학교 전체를 하나의 공원처럼 단정하게 꾸미기 위해 다소 산만하게 배치된 시설물과 주변 지형을 고려해 각종 군사 기념물과 기념탑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수목의 정리까지에도 손길을 뻗쳤다. 그리하여 화랑대는 역사적인 교훈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화랑의 후예를 위한 교육의 도장으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 되었다.

또한 1970년대 말기부터 1980년대 초기에 이르는 동안에도 많은 건물들이 신축되었다. 학교 본관 건물을 신축하여 구 본관 건물의 일본식 군대의 잔영(殘影)을 말끔히 씻어버렸다. 이공학 분야의 첨단과학 실험실과 기자재를 설치한 익양관(翼襄館)과 군사관련 과목의 수업과 실습을 전문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흥무관(興武館), 그리고 도서관 등이 증축됨으로써 15명 내외의 소규모 단위의 강의와 실험이 가능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세미나실, 소강당, 중강당, 대강당 등에서는 다양한 규모의 교육 및 강연 활동이 자유롭게 이루어 질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 교육 환경의 외형적인 정비와 발전을 도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능한 교수진의 확충 및 전문화와 교과과정을 포함한 사관학교 나름의 교육제도의 정착을 위한 노력도 괄목할만큼 이루어졌다. 우선 육사만의 독특한 교육 과정의 뿌리는 4년제 교과과정의 시행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공학 분야 과목의 수업을 75분 또는 100분 단위로 하여 193학점을 공통과목으로 부과한 점, 그리고 4년간에 걸쳐 전사학(戰史學) 및 지휘심리학 등 군사 응용 과목을 400시간 이상 수강토록 한 점 등은 일반 대학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틀이 잡혔던 이러한 이공학 분야 중심의 교육과정은 196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부분적인 개편을 겪게 된다.


1961년에는 사관생도들이 교수부에서 자습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학점을 193학점에서 174학점으로 축소하는 동시에 인문사회 과목에 대한 교육의 비중을 다소 높였다. 아울러 4학년에 4학점 상당의 선택과목을 신설하여 과도기적으로 시험 운용하였다. 사회와 군대의 전문화 추세에 부응하여 졸업생들도 어느 한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또 선택과목의 시험적 운영에 대한 사관생도들의 호응도가 높아 1967년에는 4학년 과정에 인문 및 이공계 선택과정을 증설하여 각각 6학점 및 15학점을 이수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 이수 학점도 160학점 내외로 줄여 사관생도 스스로 관심있는 분야를 찾아 집중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자습 시간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1970학년도부터는 신입생을 두 계열 즉, 인문계 (문과)와 이공계(이과)로 분리하여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군의 과학화"는 물론 문·이과별 교육 내용의 균형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1974년에는 인문사회 계열과목을 보완하여 문학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도록 교과과정을 수정하였다. 1976년에는 군의 "정신전력 강화"를 위한 조치로 국민윤리 과목을 10학점으로 비중을 높이는 등 이 후 몇 차례에 걸쳐 교과과정이 다소 변경되었다.


교육환경 및 교육제도의 개선, 우수 생도 모집 등과 함께 꾸준히 개선과 향상을 거듭해 온 또 하나의 분야는 우수한 교수진의 확충이었다. 진해에서 4년제로 개교했을 당시에는 전란중임에도 불구하고 피난차 부산 등지에 내려와 있던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의 각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초빙하여 질적으로 우수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으나 태릉으로 복귀한 뒤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따라 졸업생 중에서 우수자를 선발하여 국내외에서 민간대학교 석박사 과정을 이수케 하여 교수로 충원하는 제도를 모색하게 되었다. 교수임명을 수행하는 졸업생들은 현역 장교임과 동시에 교수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그 자격과 보임, 경력관리, 진급 등 신분에 관한 문제가 있었지만, 1968년 7월에 공포된 일반학 교관 인사관리 규정과 그 이전의 군인사법(1962년), 군인보수법 시행령(1966년)과 1970년에 시행된 군인사법 시행령 등으로 교수 인사관리에 관한 문제가 해소되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교수를 양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특수 과목인 독어, 불어, 스페인어, 노어, 중어, 일어 등 제2외국어와 법학교육을 위한 소요 교수를 충원하기 어려웠다.

또한 육사 출신 교수가 전체 교수단의 70% 이상을 상회하자 교육내용과 수준의 결정에 편견이 초래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학교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1965년부터 민간 대학교 석사학위 소지자중에서 우수자를 선발하여 중위로 임관시켜 3년간 육사에서 교수로 근무케 하는 이른바 특수간부후보생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와 함께 1976년 확정된 학교발전 5개년 계획사업의 일환으로 현직 교수의 재교육 계획이 시행됨에 따라 본교는 국내 최고 수준의 교수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육사는 유능한 교수를 어떻게 충원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면서 교수들의 지속적인 연구 활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연구실 및 연구소의 설치 문제에도 관심을 두었다. 이리하여 1964년에 한국군사 연구실이 발족되었다. 우리 나라의 군사문제를 연구 발전시키는데 기틀이 된 이 연구실은 1974년에 인문사회과학 연구소로 확장되었다.

1973년 4월에는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방위산업에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응용과학연구소가 설치되었다. 1981년 7월에는 이러한 각종 연구실을 통합하여 화랑대연구소로  발족되었다.
화랑대연구소 산하에 10개 연구실을 갖춘 현대식 연구소로 탈바꿈을 해오던 중 1988년 10월에 정식으로 학교 편제로 인가되어 군 연구소로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연구소는 군 관계 용역 연구는 물론 교수들의 개인 연구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교육과 연구활동을 활성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또한 육사는 대학교육을 위한 우수 교수진의 확보에 못지 않게 중요시되는 훈육관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일반 대학과는 다른 전인교육의 기틀을 공고히 다져왔다. 졸업생 중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장교로서 모범적인 태도와 외양을 갖추고 실무 지휘능력을 겸비한 장교를 선발하여 생도들의 내무생활을 지도하여 자치지휘근무 능력을 배양케함으로써 생도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사명감을 고취하고 강인한 의지력을 개발하며 고결한 인격을 완성하도록 하고 있다.

                       
21세기를 맞아 육사는, 세계화와 정보화 추세에 부응하여 미래 전장을 주도할 수 있는 군 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내용의 야전연계성을 제고하고, 전공과정을 심화하여 장차 군사전문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며, 생도들의 과다한 학습부담을 경감시켜 더 많은 자율학습 시간을 부여하고, 교과목학습시 경쟁적 발전의 동기를 부여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였다. 변화된 주요교육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어집중교육 체계를 정립하였다. 겨울학기 5주동안 1학년 생도들은 별도 생활관에서 영어만 사용하게 하는 가운데 일일 일과시간교육 7시간, 야간자율학습 3시간을 진행하는 듣기위주의 집중교육과정을 신설 TEPS 600점을 취득하도록 하였고, 다음 학기동안 말하기 위주의 반집중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것이다.

집중 및 반집중과정을 통해 완벽한 영어구사능력을 구비하게 된 생도들은, 다음 단계로 실생활화 단계에 돌입하게 된다. 3학년 때에는 생활화 교육을 통한 심화학습이 실시되고, 4학년 1, 2학기의 군사영어 시간에는 교범, 브리핑, 명령하달 등 한·미 연합작전 실무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이와 병행해서 전공과목을 중심으로 원서교재를 이용한 영어강의를 실시하게 되는데, 점차 
전과목의 50%수준까지 이를 확대 시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생도들은 내무반에서 VOD 시스템을 이용해서 영자신문의 기사와 영어방송을 시청하고, 교내 인터넷망을 통해 회화·작문반과 군사·시사영어반 등 Cyber Club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수양록 작성, 점호, 발표 및 토의시 영어를 사용하는 등 생도생활에서 영어사용의 기회를 늘려 나가고 있다.

둘째, 대학 과목의 야전과의 연계성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학 학문체계 정립 연구결과를 반영하여 군사응용 과목의 과목체계를 보완하고 교육내용을 보강하였다.

전산은 실무능력 배양을 위해 생활화 여건을 마련하여 PCT 700점을 취득하도록 하였고, 전쟁사는 야전에서 평생 활용할 수 있는 내용의 교육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교육시기를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조정하고 교육내용을 보다 심도 있도록 보완하고 있으며, 
논술교육에서는 논리적 사고력 및 야전실무형 보고서 작성 능력을 구비할 수 있도록 교육이 이루어진다.

셋째, 전공과정을 다양화 및 심화하여 전공학점을 일반대학 수준인 36학점으로 상향조정하고 과정수도 14개 과정에서 19개 과정으로 확대하였다.

                       
넷째, 문·이 계열의 차별화 및 선택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교양과목중 8개 과목을 계열화하고 선택의 기회를 부여하여 생도들의 자율성과 학습 동기유발을 촉진하였다.

마지막으로, 군사학교육을 대폭적으로 강화하였다. 중·소대전투, 대대전술, 참모업무, 적전술, 부대관리 교육 등을 강화하고 야외기동훈련에 참가하며, 졸업전 병과교육을 실시하는 등 생도들이 조기에 군사안(眼)을 형성하여 임관과 동시에 완벽하게 야전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할 수 있도록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발췌]

요약: 육사 11기 이전의 기수

   1기(1946년 5월 1일 개교, 전날 폐교된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되지 못한 학생 60명과 국방경비대 소속 사병 28명으로 개교)
   2기  3기 4기 5기 6기 7특기 7기 7후기 
                         * 교명(조선경비사관학교)
                           교육기간은 45일-6개월, 5기생과 7기생은 민간지원자로 6개월.


   8-2기 8-3기 8-4기 8-5기 8기(22주 교육)  9기(23주 교육)  

  10기(생도1기, 2년과정으로 모집하였으나 1년으로 단축됨, 졸업 1주일  전에 6.25동란 발발, 동년 7월 10일 생존자 임관))  
  생도2기(4년과정으로 입학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인하여 같은해 육군종합학교에 편입 종합1, 2기로 임관)  
  11기(1951년 10월 31일 진해에서 4년제로 개교)... 실질적인 4년제 사관학교가 출범한 기수.
                         * 육군사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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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국방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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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는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으로서 1946년 1월 15일에 미군정이 1개 연대 병력으로 창설하였다. 이 날은 육군 창설 기념일이기도 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육군"으로 개편되었다.

* 시발점

광복과 함께 자주국방력 보유라는 명분 아래 일본군·관동군·국민혁명군·팔로군·광복군 출신자들을 주축으로 한 사설군사단체 혹은 유사군사단체가 우후죽순 생겨 그해 11월에는 그 수가 무려 60여개를 헤아렸다. 이같은 난립의 폐해를 막고 정식 군대 창설을 위해 미군정 당국은 이들 단체에 대한 해체령을 내렸다.
창설 이후 각 도 별로 1개 연대씩 창설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늘려나갔다. 창설 당시 병력은 태릉에 있던 구 일본군 지원병훈련소(현재의 육군사관학교)에서 660명의 병력으로 출발하였다. [1] 동년 6월 15일'〈군정법령〉'에 의거하여 '국방경비대'가 '조선경비대'로 개칭되고 [1], 국방경비사관학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 주요 지휘관

창설 당시 50대의 중견급 군장교로서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던 원로급 일본군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914년 ~ 1915년에 졸업, 임관한 제26기생과 제27기생들이었다.

* 직책 이름 전직 또는 출신

총사령관 원용덕 만주 군의(軍醫) 중좌
제1연대장 채병덕 일본육사 49기
제2연대장 이형근 일본육사 56기
제4연대장 겸 총참모장 정일권 만주군관학교
제5연대장 백선엽 만주군관학교

나중에는 좌익이 대거 국방경비대에 들어감으로써 국방경비대의 성격이 달라지게 되어 국립경찰과 국방경비대 사이의 무장충돌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1] 부대 확충은 모병(募兵)에 의해서 이후 연대가 계속 증설되어 여단이 편성되었으며, 1949년에는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켜 전쟁 전에 10개 사단을 일단 갖추었다. 1연대가 1여단으로 확대되고, 1연대의 1개 대대를 모체로 다른 연대를 창설하였으며, 1여단이 다시 1사단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사단들은 제대로 갖춰진 게 부족한 껍데기만 사단이었으며 경험 있는 인력과 장비가 태부족했다(백선엽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 사단들은 제대로 된 전투 능력과 경험이 부족했다고 했으며, 그 한 예로 사단을 105mm 1개 대대가 지원하면서 포탄을 한 발 한 발 세가면서 쐈다고 했다). 일단 형태만 갖추는 것에 급급했던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조선경비대를 '육군'으로 개칭하였으며, 11월 3일에는 '국군조직법'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국방부 산하에 육군본부를 두어 완전한 국군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참고 문헌 1.0 1.1 1.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194~197쪽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B%82%A8%EC%A1%B0%EC%84%A0%EA%B5%AD%EB%B0%A9%EA%B2%BD%EB%B9%84%EB%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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