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철도'는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다 korailhs



[특집] '철도'는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다


 

  

 

2009 10/13 위클리경향 845

 

폐쇄 위기 간이역은 마을도서관 변신서울 한복판에 아직도 철도 건널목

 

경기 연천군 신망리역. 신망리역에 문고를 설치한 후로 찾는 사람이 늘었다. <임석빈 인턴기자>

 

국내 등록 자동차 1700만대. 연간 항공편 승객 3000만명. 어느 새 단거리는 자동차, 장거리는 비행기가 공식이 됐다. 급증하는 자동차와 항공 이용객 사이에서 철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시속 200km 이상 주행하는 고속철도가 등장하면서 비둘기호나 통일호 등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간이역이나 무인역은 사라지고 대신 공항 못지 않은 대형 기차역이 생겨났다. 자동차와 항공기에 밀렸던 철도가 교통의 총아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철도와 삶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있어 철도는 단순한 교통수단 그 이상이다.

 

역무원 대신 정()이 있는 신망리역.

이삭이 완전히 영글지 않아 푸른 빛이 넘실대는 논. 그 사이를 시원하게 가르는 경원선 끝자락.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한 신망리역은 역무원이 없는, 이른바 무인역이다. 신망리역은 북쪽으로 대광리역과 신탄리역 두 곳밖에 없고, 하루 승객이 100명도 되지 않는 한적한 곳이다. 철도청은 경제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올해 11일부터 신망리역의 승차권 발매를 중단시켰다. 이로 인해 신망리역은 완전히 외딴곳이 됐다. 그러나 역사로서의 기능을 잃은 채 잊혀져 가던 이곳에 작은 변화가 일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에 신망리역 일대(상리)가 피란민 정착지역으로 지정되면서 피란촌이 형성됐다. 이곳에 위치한 미 7사단은 군수물자와 여객을 수송하기 위해 기차역을 만들었다. 당시 미 7사단장은 이곳을 전후 새로운 희망이 피어날 곳이라며 뉴호프타운(New Hope Town)’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를 우리말로 옮긴 신망리가 역의 이름이 됐다.

 

50년이 넘게 자리를 지킨 신망리역이 지난 1월 승차권 발매를 중단하면서 폐쇄 위기에 몰렸다. 윤여일 목사(63)는 역 폐쇄를 막기 위해 철도청에 도서관 설립을 제안했다. 윤 목사는 처음에는 임대해 조그만 문화 공간을 만들 계획이었다면서 철도청 회의를 거쳐 명예역장이 관리하는 형식으로 역이 존립하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윤 목사는 상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이원갑씨(55)와 모 대학 건축과 정영태 교수(45)에게 공동 명예역장을 제안했다. 목사 신분으로 역장까지 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신망리역의 변화가 시작됐다. 이원갑 역장은 우리(공동 명예역장)는 껍데기이고 배후 조종자는 윤 목사라면서 신망리역을 존립케 한 1등공신이라고 윤 목사를 치켜세웠다.

 

서울 한강로 백빈 건널목으로 화물차가 지나가고 있다. <임석빈 인턴기자>

이들은 신망리역을 단순한 간이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을 중앙에 위치하며 농사일에 지친 주민과 역을 지나가는 승객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신망리역을 문화공간으로 조성키로 계획했다. 윤 목사는 소장하고 있던 책 2000여 권을 기증했다.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얻어 책을 옮기고 역사에 책장을 만들었다. 66(20) 남짓한 공간이 책으로 가득 찼다. 윤 목사는 도서관을 신망리역 문고라고 이름 붙였다. 이 역장은 역사 곳곳에 의자와 탁자를 비치해 주민과 승객이 책을 보거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공간을 만들었다. 정 역장은 오래돼 흉물스런 역사를 깔끔하게 꾸며 주민과 승객이 편히 쉬다갈 환경을 조성했다. 신망리역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주민들의 첫 반응은 냉담했다. 이 역장은 농사일로 바쁜 동네에 무슨 도서관이냐면서 미친 놈 보듯 취급했다고 웃어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정성으로 마을에 조금씩 변화가 일었다. 지나가던 주민들이 마련한 자리에 앉아서 쉬어가기 시작했다. 평소 멀리한 책을 읽는 이도 생겼다.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도 책을 읽거나 마을 주민과 대화를 나눴다. 사람이 모이니 자연스레 활기를 찾아갔다. 신망리역의 변화에 고무된 이들은 지난 815참거리 나눔 행사를 열었다. 열차를 타는 승객과 마을 주민들에게 국수를 대접하며 정식으로 신망리역 문고의 탄생을 알렸다. 이 역장은 처음엔 무슨 국수타령이냐며 발길을 돌리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한 명씩 찾아왔다면서 당시 반응이 좋아 앞으로 매달 한 번 나눔 행사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신망리역은 잊혀져 가는 무인역에서 마을의 사랑방으로 변해 갔다. 윤 목사는 승객이 줄어든다고 정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면서 문화공간으로 시작했지만 따스함이 흐르는 정 나눔터로 만들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주인 없는 무인역인 신망리역. 이곳에 공동 명예역장들이 일으킨 조그만 변화는 마을 주민과 신망리역 승객들에게 따스함으로 퍼졌다. 이제 신망리역은 정이 흐르는 새로운 ‘New Hope Town’으로 변해 가고 있다.

 

기찻길 옆 사람들.

한강을 내려다보는 빌딩 숲 사이로 철길이 흐른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 백빈 건널목. 서울 시내에서 보기 드문 철길 건널목이다. 이 건널목에는 스쳐 지나가는 이와 머무는 이의 상이한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김민우씨(27)는 지난해 여름 사진 동호회원들과 출사를 나오면서 처음 백빈 건널목에 왔다. 고즈넉한 느낌이 마음에 들어 꾸준히 찾고 있다. 김씨는도시 한가운데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면서 기찻길과 그 옆의 허름한 집, 그리고 지나가는 노인들은 최고의 피사체라면서 연방 셔터를 눌렀다. 신식 빌딩 속 철길과 그 옆으로 줄지어진 오막살이는 많은 사진 애호가에게 매력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정작 철길 옆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정하게 들려오는 소음과 불편한 주변 환경일 뿐이다.

 

유모차를 밀며 백빈 건널목을 지나던 김옥림 할머니(가명·72)의 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건널목에 파인 철로 때문에 건너기가 쉽지 않다. 김 할머니는 허리가 펴지지 않아 유모차를 밀면서 다닐 수밖에 없다면서 건널목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말했다. 30년을 넘게 근처에 주거하는 김 할머니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루에 186차례의 열차 이동에 발생하는 소음이 가장 큰 문제다. 시속 30km 이하로 서행한다지만 육중한 열차가 통과하며 발생하는 소음은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철로 옆에 세워진 집은 소음과 함께 진동에 시달린다. 집이 수십 년 전에 건설돼 노후됐기 때문이다. 김 할머니는 견딜 만해도 익숙해지진 않는다면서 젊어서 열심히 돈을 모아서 여길 떠났어야 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창래 관리원(62)4년째 백빈 건널목에서 근무하고 있다. 열차 운행에 맞춰 건널목의 통행을 관리한다. 이 관리원은 지난 1995년에 20년 동안의 철도원 생활을 정리했지만 10년이 지나 현재 다시 철길 옆으로 돌아왔다. 이 관리원은 철도에 대한 애정보다는 용돈을 번다는 생각에 다시 나왔다면서도 주민과 행인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사명감을 갖는다고 웃었다.

 

백빈 건널목은 하루에 186대의 열차가 지나간다. 시간으로 따지면 길게는 8, 짧게는 2분마다 열차가 지나간다.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 게다가 폭 6의 건널목으로 차량과 행인, 특히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많아 신경 쓸 것도 많다. 실제로 안전선을 넘어 차를 세우는 운전자, 열차를 무시하고 그냥 건너려는 행인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관리원은 사진 찍는 사람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겐 항상 아슬아슬한 곳이다면서 이런 곳도 빨리 재개발돼 일하는 사람도 주민도 모두 편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경과 절망. 그리고 희망.

 

아름다운 철도원김행균 역곡역장(48). 20037월 김 역장은 승강장 안전선 밖에서 놀던 아이를 구했다. 그러나 자신은 달려오는 기차에 치여 두 다리를 잃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현재 그는 여전히 철도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김 역장은 일곱 차례의 대수술을 치렀다. 사고 후 절단된 왼쪽 다리의 접합수술을 받았지만 신경회복이 되지 않고 관절상태가 좋지 않았다. 결국 접합한 왼쪽 다리를 다시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현재는 왼쪽 다리는 의족에 의지하고 오른쪽 다리는 발등 부분이 없다. 20년을 넘게 함께한 철도에 다리를 잃고 좌절할 법도 했다. 그래도 김 역장은 내상을 입거나 뇌를 다친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면서 다시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기에 절망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현재 김 역장은 서울 지하철 1호선 역곡역을 맡고 있다. 열차 운행을 관리하고, 역사를 순회하고 점검하는 등 다른 역장과 똑같은 업무를 한다.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김 역장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승객을 맞이하고, 직접 찾아오는 이들에게 차를 대접하기도 한다. 김 역장은 하루에 한두 명이 찾아온다면서 가끔은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와 인사를 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웃는다. 모두 철도가 맺어 주는 새로운 인연이다.

 

김 역장과 철도의 인연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놀이터가 없던 동네에서 기찻길 옆 공터는 최고의 공간이었다. 김 역장은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서 언젠가 내가 운전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어려웠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김 역장은 학비가 면제되는 국립철도고등학교로 진학했다. 1979년 학교를 졸업한 이후 철도청에 입사했다. 이를 기반으로 가정을 꾸리고 두 아들도 키웠다. 그리고, 두 다리를 잃었다. 김 역장의 삶은 그렇게 철도와 함께 달려 왔다.

 

철도는 저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어릴 적부터 옆에서 지켜보며 자랐거든요. 그리고 30년 동안 철도 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한때는 절망을 주기도 했죠. 철도는 마치 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요.철도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매개체죠. 저는 그 가운데 서서 평생 사람을 이어 주는 일을 할 것입니다.”

 

 

<임석빈 인턴기자 zomby011@hanmail.net>

 




철도창설 111주년 기념 철도주요연표 2010

koraill_history-converted.docx


덧글

  • 철도원 2018/10/07 12:17 # 삭제 답글

    https://drive.google.com/open?id=1m7C9ws7n2-7ZWNQkX2lP84GCUP5t0U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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