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한국인 의식주 변천사] ⑩ 음주 문화 usual



[광복 70년 한국인 의식주 변천사] ⑩ 음주 문화

밤새도록 부어라, 마셔라…그 많던 주당은 집에 잘 들어가셨소

요즘 ‘순하리 처음처럼’이라는 14도짜리 술이 인기야. 소주가 달달한 맛이라니 좀 그렇지. 독하게 취하는 맛에 술을 먹는 건데 좀 이해하기 어려워. 구보 씨가 대학생 땐 28도짜리 소주를 마셨는데 도수가 절반으로 줄었네. 술은 악마가 인간에게 남긴 최고의 선물이래. 신라시대엔 포석정에서 곡수유상(曲水流觴 : 굽어서 흐르는 물에 술잔 띄워 주고받기)하며 놀았는데, 시대 흐름에 따라 술 마시는 기호도 달라졌지.

광복이 되고 나서 아버지 술심부름을 자주 다녔어. 꼬마 녀석이 막걸리 받으러 주전자 들고 양조장에 가면 아저씨들이 “갖고 가다 먹으면 안 돼. 지켜볼 거야.” 이랬어. 골목길로 꺾어지기가 무섭게 한 모금씩 홀짝거렸는데, 10대 소년이 술맛을 알았을까만 막걸리를 홀짝홀짝 제법 맛있게 먹었어. 술 양이 줄어든 걸 아셨겠지만 아버지가 뭐라 하신 기억은 없네





소주 폭탄주.(사진=동아DB)


                                                           소주 폭탄주(사진=동아DB)


우리나라 전통술은 크게 탁주, 청주, 소주 세 가지야. 탁주는 즉석에서 걸러 마시니 ‘막걸리’라 하고, 청주는 탁주보다 더 곱게 빚은 고급술이라 약주(藥酒)라 하고, 소주는 고려시대 이후 보급된 가장 독한 전통주야.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막걸리는 서민의 애환을 달래는 대표 술이었지. 지금도 막걸리는 인기야. 그러기에 막걸리학교 허시명 교장은 “막걸리는 최고의 인간 접착제”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어.

막걸리, 소주, 맥주, 청주, 양주, 고량주, 인삼주, 과실주, 약주, 기타 재제주 등 술 종류가 많기도 하지. 충주에 있는 세계술문화박물관 ‘리쿼리움’에 가보면 100여 나라의 온갖 술이 전시돼 있잖아. 그 많은 술들이 우리의 희로애락과 함께했지. 조선 영조 때 화가 김홍도의 ‘만월대계회도(滿月臺契會圖)’를 보면 거나하게 무르익은 술잔치 장면이 산수화와 풍속화가 중첩되며 한 화폭 속에 절묘하게 구현돼 있어.

1970~1980년대엔 대학생들이 ‘깡소주’를 많이 마셨어. 때론 중국집에서 짬뽕 국물 하나 시켜놓고 ‘빼갈(배갈 : 고량주)’을 마시며 시대의 울분을 토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깡소주’가 대세였지. 그 시절의 대학생들은 어두운 시대를 한탄하며 정치 문제를 안주 삼아 ‘깡소주‘를 많이도 마셔댔어. 그때 아들 녀석이 하도 술을 마셔대기에 안주는 뭘 먹느냐고 물었더니, 친구 자취방에서 새우깡 하나 놓고 마셨다는 거야. “안주를 든든히 먹어라.” 내가 아들 녀석에게 술과 관련해 했던 첫 번째 충고가 아니었나 싶어.

1990년대 이후부터는 소주의 도수도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어. 맥주 마시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지. 생맥줏집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야. 맥주가 소주보다 더 부드럽게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늘어서였겠지.

영하의 날씨를 녹이던 포장마차의 소주. 1975년 12월 세밑 풍경.
                       영하의 날씨를 녹이던 포장마차의 소주. 1975년 12월 세밑 풍경.(사진=동아DB)

1980년대의 시골 막걸리 양조장.
                 1980년대의 시골 막걸리 양조장.(사진=동아DB)

“1차에서 끝” 기업 회식 문화 변화
술 잘 마시는 여성 급격히 늘어

직장에서의 회식은 좀 많았어? 술을 빼놓고는 우리네 회식 문화를 말할 수 없어. 보통 1, 2차는 소주나 맥주였지만 3차로 가면 반드시 양주를 마셨지. 회사에서 경험했던 수많은 접대 문화를 생각해봐. 폭탄주를 필두로 양주에 다른 술을 섞어 묘기를 부리는 온갖 제조 기술이 한 편의 무협지 같았어.

술의 신 박카스나 일본에 누룩을 전파해 지금도 일본에서 주신으로 모시는 백제인 수수허리(須須許理)가 환생해도 놀라워했을 묘기 대행진이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엔 기업의 회식 문화도 바뀌고 있대. 팀원끼리 공연을 보고 간단히 저녁 먹는 문화형 회식이나 스포츠를 함께 즐기는 레저형 회식으로 바뀐다는 거야.

맛있는 식당을 찾아다니며 맥주 정도를 간단히 곁들이는 맛집 회식도 유행이라네. 거 뭐냐, ‘119 운동’이라고 들어봤어? 1차에서 한 가지 술로 밤 9시 이전에 회식을 끝내자는 캠페인이래. 다 좋은데 뭐랄까, 서로 부대끼는 그런 맛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운 구석도 있어.

광복 후부터 지금까지, 술 마시는 기호의 변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술 잘 마시는 여성들이 대폭 증가했다는 거야. 아직도 현장에서 중소기업을 이끄는 내 친구들이 그래. 요즘 신입사원들과 술자리를 해보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술을 더 잘 마신다는 거야. 물론 다 그렇다고 보편화할 수는 없겠지만 술 잘 마시는 여성이 늘어난 것만은 분명해. 아니, 광복 직후에도 마시고는 싶었겠지만 아마도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대놓고 마시지 않았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그리고 청소년의 음주 횟수가 늘고 있는데, 이는 구보 씨가 아버지의 막걸리를 홀짝거렸던 경험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제야.

순하리 처음처럼.
     순하리 처음처럼.


술 광고 관련해서도 할 얘기가 많아. 텔레비전에서는 밤 10시 이후에만 술 광고를 할 수 있어. 술이 필요하긴 하지만 청소년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이 크니까 나름대로 규제를 한 거야. 최근 ‘아이유법’이 화제가 됐잖아? 만 24세 이하는 술 광고 모델을 금지하기 때문에 아직 그 나이가 안 된 가수 아이유가 광고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거지. 그래서 왜 하정우는 되고 아이유는 안 되냐, 24세 미만에게 광고 모델을 금지하면 청소년들이 과연 술을 안 먹을까, 하며 이런저런 반론도 있었지. 그렇지만 술 광고 규제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이 또한 시대에 따라 점점 변해가지 않을까 싶어.

그래, 술을 안 먹을 수는 없어. 잘만 먹으면 얼마나 좋겠어? 김수연 명창이 구성지게 불러 유명해진 ‘사절가(四節歌)’의 한 대목을 소개할게. “~~ 인생이 모두가 백 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후에 만반진수(滿盤珍羞 : 상 위에 가득 차린 귀하고 맛있는 음식), 불여생전(不如生前)에 일배주(一杯酒)만도 못하느니라. (중략) 국곡투식(國穀偸食 : 나라 곡식을 훔쳐서 먹는 것) 하는 놈과, 부모 불효 하는 놈과 형제 화목 못 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아서 ‘한잔 더 먹소, 그만 먹게’ 하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자.”

죽은 다음의 진수성찬도 생전의 한잔 술만 못하다며 한번 놀아보자니, 어때 술맛 나지 않아? 이럴 땐 ‘순하리’보다 ‘독하리’가 더 낫겠지. 그렇지만 “술이 떡이 되지 말고, 술이 덕(德)이 되게 하라”는 주당의 계명(허시명, <주당천리>)도 마음에 새기며 마셔야겠지.

* 이 시리즈는 박태원의 세태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년)의 주인공 구보 씨가 당시의 서울 풍경을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살아온 지난 70년의 기억을 돌아본 글이다.

글 ·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 전 한국PR협회장)

[위클리공감]
原文
            우리나라 술의 진화와 소주의 역사   winestory.docx


덧글

  • 술집변천사 2016/03/30 16:17 # 삭제 답글

    우리나라 주점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나타난다.
    고려 성종2년(983년)에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숙종 7년(1102)부터는 서민의 주점이 처음으로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개경에 좌우 주점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과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한다. 결국 화폐통용의 이익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관설주점을 개설한 것이다. 이러한 관설주점이 나라로부터 허락받은 주점이라면 그외에도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점도 있었다. 문헌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가요 쌍과점에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는 것을 보아 민간에도 술을 소매하는 집이 이미 정착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국가적 종교로서 각종 특혜를 누리던 불교사원들이 가장 규모가 큰 주점이었다는 사실이다. 불교사원들은 세금과 역을 면제받고 술, 국수, 마늘, 소금 등을 판매하면서 숙박업까지도 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효종 대에 이르러 화폐가 점차 유통됨에 따라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주막이 생겨나게 되었다. 주막은 조선후기에 장시(場市)가 번성하고 역참제도라는 교통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더불어 번창하였는데, 장시에 모여든 사람들이 화폐를 지불하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잘 수도 있었으며, 곳에 따라서는 접대부를 두는 곳까지도 있었다. 주막(酒幕)의 막(幕)은 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부분 주(酒)자를 적은 깃발을 내걸어 주막임을 표시했다.
    주막은 19세기 후반부터 여행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전국의 교통요지 곳곳에 생겼다.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헌주가, 소주가, 병주가, 주막, 목로주점, 내외술집, 모주가, 색주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점이 등장하였다.




    헌주가


    한말의 헌주가는 비교적 규모가 큰 양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약주를 만들어 도매를 하며 소매도 하였다. 또 부업으로 탁주와 백주를 약간 만들기도 하는데 6~7칸의 공간에 2석들이 큰독 50~60개를 갖추고 있었다. 헌주가의 술값은 선금이나 현금으로 지불하고 일정기간에 한번씩 계산하였다.




    병주가


    술집, 바침술집이라고 해서 술을 소매하는 집으로 문간에 술병을 그려 붙이고 중간에 손님이 술생각이 나면 중노비에게 돈을 주어 근처 병주가에서 사다가 마시는 것이다. 병주가에서는 소주, 약주, 백주주등은 헌주가 소주가에서 사다 팔지만 탁주는 직접 빚어 팔았다.




    소주가


    소주가는 소주의 제조, 판매를 주로 하고, 서울이남에서도 탁주가를 겸하는 일이 많으나 서울이북이 그 규모가 커서 큰독 70~80개에서 100개까지 갖춘 곳이 적지 않았다. 유명한 서울 공덕리에 50∼60호와 합해서 줄잡아 100호 정도가 연간 2,500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목로술집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고급 요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반 대중이 많이 이용하는 목로 주점이 술집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목로 술집은 "선술집"이라고도 했는데, 서울 장안에는 당주동, 청진동, 모전다리(무교동), 이문안(종로2가), 동관 대궐 앞(종로4가), 구리개(을지로2가) 등에 많이 모여 있었다.뒷골목이나 으슥한 곳에 좁은 목판을 벌여놓고 술한잔에 너비아니나 술국 등을 곁들여 파는데 술값만 받는다. 술잔을 놓는 긴 나무를 "목로"라고 하고, 이것을 놓아 술자리를 마련한 목로 술집은 사방이 터진
    온돌에 큰솥을 걸어 놓고,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떠서 끓는 물에 중탕을 해서 손님 잔에 부어 주는 것이다. 동대문 시장 동문 밖의 "흥코집", 동관 동문 안에 "동양루"라는 목로 술집, 신설동의 "형제집" 등이 꽤 유명한 편에 속했다. 목로주점은 조선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6.25전쟁 전까지 성행하였다.



    내외주점

    한국 몰락양반의 위상을 가늠하는 사회현상으로 내외(內外)주점을 들 수 있다. 술집해서 호구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을 양반도 술집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물론 내외술집에는 술집표시가 없다. 알음알음으로 찾아가 문전에서 판자문을 약간 밀고 "이리 오너라" 하며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그럼 안방에서 "들어오셔 청마루에 자리를 깔고 앉으시라 여쭈어라" 하는 마님소리가 들린다. 내외술집은 일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경우에는 중문 안에서 개다리소반만을 내민다고 "팔뚝집" 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내외술집도 나중에 색주가로 전락하여 그 풍습은 없어졌다고 한다.



    이동술집

    서울의 풍물로 광주리 소주방 또는 공덕리 소주방이라는 이동 술방이 있었다. 주종은 소주로, 오지병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장터나 성안에 드는 길목에 펴놓고 술을 판다. 향학열이 남달랐던 황해도 신계, 곡산, 안악 등지에서 자녀나 남편을 출세시키고자 어머니와 아내가 길거리로 나선 것이다.





    급속도로 발전한 민속주는 조선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일제 시대를 거쳐 서양 술들의 유입으로 더욱 다양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각 가정에서 자가 양조였고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으나 1909년 주세법이 발효되어 생산량에 따라 과세하는 간접세가 생긴 후 5차에 걸친 주세령의 개정으로 1934년에는 자가용 술 면허자가 완전히 없어졌다. 천업으로 여겨왔던 주조업에 양반 계급이 다투어 종사하게 됨에 따라 주조업자가 비대해지고 술의 품질이 주세를 위하여 규격화 되어감에 따라 명주가 사라지고 심한 주세에 백성들의 원성 높아졌으며, 밀주의 성행과 일제의 단속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전통주는 차츰 그 자취를 감추게 되고 풍류가 깃든 조상의 술 빚기도 없어졌다. 개화기를 거치고, 이른바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음식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무슨 무슨 음식점"이란 상호가 없었다고 한다. 그저, 술손님이나 밥손님을 맞아 들이다가 찾아오는 손님측에서 자연히 그 집의 모양이나 위치, 혹은 음식점 주인의 별명을 붙여서 부르게 되고, 그러다가 음식점은 자연스럽게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회나무집, 오동나무집, 이문안 설렁탕집, 잠바위 설렁탕집, 백목다리 장국밥집, 황포추탕집, 형제추탕집 등 이런 식으로 음식점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주당들을 몸살나게 한 나라베 술집


    일제말에 성행했던 술집이다. 그 당시 뭐니뭐니 해도 서러운 것은 굶주림이었다. 일제 말기에 한창 식량기근에 허덕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술의 기근 사정에 이르러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곡물로 빚던 술을 금해서 밀주(密酒)가 철저한 통제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천행으로 주당(酒黨)의 숨통까지 막기는 무엇했는지 일제는 조그만 선심을 하나 베푼 적이 있다.
    즉 "나라베(줄서기)" 술집의 출현이다.
    오후 5시만 되면 문을 열던 나라베 술집은 천하의 음주당들을 몸살나게 만든다. 그나마 어물쩍대다가는 한잔술도 차례가 가지 않는 비극적 종말이 두려워 오후 서너 시부터 술집 앞에는 때이른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이 연출되곤 했었다.





    멋쟁이들이 출입하던 카페


    "붉고 파란 등불 밝지 못한 샹들리에 아래 담배연기 술 냄새를 재즈에 맞춰 춤추는 젊은 남녀의 옷깃이 소용돌이 친다. 그 틈에 흘러나오는 여급의 목소리는 누님처럼 차분히 가라앉고 오히려 사나이들의 언행이 초조하고 격앙돼있다." 김동환의 30년대 카페 풍경의 묘사다.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영업을 하고 있는 카페는 일제시대때부터 이미 성행했다. 당시 서울에는 "낙원" "왕관" "엔젤" "태평양" 등의 카페가 있었다.


  • 술집변천사 2016/03/30 16:18 # 삭제 답글

    밀실정치의 대명사 요정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번창하다가 70년대말까지 인기를 얻었던 요정은 일제시대때부터 비롯됐다. 한말 사양의 궁중에서 퇴출당한 것은 궁녀만이 아니다. 팔도에서 음식솜씨 좋다하여 선상된 숙수(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들도 퇴출대상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종황제가 흡족해하는 간을 가장 잘 맞춘다는 안순환이라는 숙수가 있었다. 일제의 강제병탐 후 궁에서 퇴출당한 안순환은 황로마루(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남동쪽 모서리)에 조선 요리집을 차렸다. 당시 풍토로서 조선 요리집이란 벤처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명월관이다.
    명월관 본점은 1200평의 땅에 건평 600평이 넘는 큰 집이요 종업원수가 120명이나 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 큰 기업형 요정이었다. 이밖에 식도원, 국일관, 송죽원, 태서관 등의 요정이 당시에 성행했다.
    70년대 요정의 산실은 단연 삼청각이다. 이곳은 1972년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6,000여 평 대지에 건축되어 1970년대 여야 고위정치인의 회동과 남북 비밀협상,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손님이 줄어들어 1990년대 중반 이름을 예향으로 바꾸고 일반음식점으로 전환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99년 12월에 문을 닫았다.








    해방 후 미군의 주둔과 6.25를 통하여 서양술이 선보였고, 이로 인하여 부유층들은 고급 양주를 선호하게 되었다. 서민들은 집에서 술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의 명주들은 사라지고 획일적인 개량식 막걸리가 주종을 이루었다. 6.25 이후에도 서민들은 정치적 불안과 가난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이때의 술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해방과 6.25를 거치는 동안 8도에서 서울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전주식당이니, 부산횟집, 평양식당, 함흥냉면집 등 지방 고유의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이 늘어나게 됐다. 평양냉면집, "우래옥", 곰탕집 "하동관", 돼지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최대포집", "남포면옥", "부민옥", 오장동의 "함흥냉면", 청진동 해장국집 "청진옥" 등이 비교적 오래된 음식점으로 꼽히는데, 이 밖에도 전통을 자랑하는 음식점은 많았다.일제 해방과 한국동란은 상당수 업종전환 및 메뉴 변경을 실시하게 한 큰 사건이었다. 곰탕, 설렁탕, 해장국, 도가니탕, 보신탕 등 "탕"의 전성시대를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도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포장마차


    해방이후부터 생겨나 지금까지도 계속적인 인기와 명맥을 이어온 장수업종의 하나로서 주머니 돈이 부족한 서민층의 애환을 달래주는 주점의 형태이다.50~60년대 청계천 등지에서 광목으로 윗도리만 겨우 가린 채 참새구이에 잔 소주를 팔던 포장마차는 70년대에 접어들며 요즘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포장마차는 대표적인 서민 주점이었다. 지금도 30~40대 샐러리맨들은 그 옛날 잠원동 "한신 포차"같은 정통 포장마차에 대한 향수를 되새기곤 한다. 그러나 얼마 뒤 개발 바람과 함께 상당수의 포장마차 촌이 사라졌고, 현재는 종로, 인사동, 사당동 등에서 근근히 명맥을 잇는 정도다.





    훈훈한 정이 오가던 대폿집


    대폿집이란 말은 해방전만 해도 없었다. 그때 술집은 목로집, 목로술집, 선술집이라고 했다. 그러다 해방이후 대폿집이라는 말이 쓰였고 60~70년대까지 대폿집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곳이었다. 붉은 페인트로 왕대포라고 씌어진 창문이 달린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커다란 드럼통에 화덕을 만들고 연탄불을 피워 실내는 매캐한 냄새와 사람들의 훈기로 가득 차 있다. 연탄불 위에는 안주거리가 끓고 담배연기와 음식물의 훈기, 무엇보다 정겨운 친구의 체온이 느껴지는 그리운 풍경이다.





    자유부인이 드나들던 카바레


    교수부인의 춤바람을 다룬 영화 "자유부인"(1955)의 인기가 말해주듯, 50년대 도시에서는 춤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 당시 서울에는 카바레, 댄스홀이 급증했다. 61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 카바레 67개소 중 17개소, 바 328개소 중 144개소, 다방 2,083개소 중 1,086개소가 서울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카바레는 5.16이후 그때까지 유행했던 댄스홀이 폐쇄되면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카바레는 주로 중, 장년층들을 위해 공간이었으며 주로 소주와 막걸리를 마셨다.
  • 술집변천사 2016/03/30 16:20 # 삭제 답글

    경제 개발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던 시절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분이 송두리째 변혁을 겪었다. 사람들은 도시로 이동하였으며 의식주 생활 방식이 달라졌다. 농경 문화에서 도시 산업사회 문화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바빠지고 평가 기준은 능률이나 돈이 되었다. 외국과의 무역을 통하여 걷잡을 수 없이 들어온 미국식 문화도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와중에 음주 문화도 대변혁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선 술의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면 단위마다 막걸리 양조장이 들어서고 생산량이 해마다 늘었다. 1965년부터는 정부의 양곡 정책으로 쌀이나 보리 등의 곡물을 술의 원료로 쓸 수 없게 되어 희석식 소주가 대량 공급되었다. 서민들은 소주를 주로 마시게 되었으며 점차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각종 행사에 술을 넘치도록 내놓는 것이 관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 주로 마시던 술을 막걸리, 소주였다. 70년대 말에는 맥주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전통 주막과 소주집에서 서구화된 맥주집이 늘어났고 가정 소비도 꾸준히 늘었다. 70년대는 요정정치의 시작으로 살롱, 스탠드바, 나이트클럽 회관 등의 고급 서비스업종이 기승을 부렸다. 또한 음식점 문화는 삼겹살, 돼지갈비, 등심, 갈비 등 고기문화로 전환되었다. 술과 고기는 실과 바늘의 관계인 것이다.





    연예인들의 주요활동 무대 극장식당


    70년대 유행했던 극장식당은 당시 연예인들의 주요활동무대였다.
    당시 인기 있었던 곳은 아마존, 초원의 집, 무랑루즈, 월드컵 등으로 손님들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쇼를 보며 술도 즐기는 즐거움을 가졌다.





    밴드가 연주하는 나이트클럽


    나이트클럽은 70년대 들어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무교동엔 장안 최고의 나이트 클럽으로 이름을 날리던 스타 다스트가 있었고 코파카바나가 그와 경쟁을 했다. 하지만 당시 나이트클럽은 지금과 같이 DJ가 있어 다양한 음악을 틀어주는 것이 아니라 밴드가 직접 라이브 음악을 연주했다. 40~50대들이면 지금도 기억하는 "사랑과 평화" 같은 대중음악 밴드들이 당시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했다.





    대폿집의 후신 - 학사주점


    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생겨난 학사주점은 60년대의 칙칙한 대폿집 분위기에서 발전된 보다 더 세련된 모습의 주점이었다. 막걸리, 동동주에 파전과 두부김치로 김치찌개, 참치찌개 등이 가장 사랑 받았던 메뉴이고 현재도 대학가의 먹자골목의 한 귀퉁이에 몇몇 곳이 명맥을 유지하면서 꾸준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 종로의 피맛골은 서울의 대표적인 학사주점 골목이다.





    3저 호황의 최대 수혜자 - 맥주집


    맥주가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것은 일제 식민지 초기에 일본에서 수입되면서부터였다. 맥주 소비량은 76년까지만도 막걸리의 10분의 1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맥주시장이 불붙은 것은 7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맥주집이 생겨나면서부터다. 그러던 것이 80년대에 들어와 3저 호황에 힘입은 소비주의 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 맥주의 소비량 증가와 함께 맥주집도 성행을 하게 됐다.





    쇼도 보고 대화도 하고 - 스탠드바


    한국에 바가 들어온 것은 1930년대 무렵이다. 카운터가 있고 양주를 파는 술집을 바라고 했다. 스탠드바는 70년대에 유행했던 바의 형식이다. 주로 음악을 연주하고 쇼를 보여주는 무대가 앞에 있고 몇몇의 독립된 마담들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다. 손님들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마담 테이블에 앉아 대화도 하고 쇼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삼국시대때부터 이어진 - 룸살롱


    고급 술집은 삼국시대로부터 서민들과는 상관없이 면면 이어져 내려왔다. 이곳에서 권세가들이 정치적 담론을 해왔고 그들만의 여흥을 즐겼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이런 식의 술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니 바로 룸살롱이다. 특수 계층만 드나들던 고급 술집에 대중이 드나들게 되었다.







    80년대는 60, 70년대 고도성장의 결실이 맺어지는 시점이기도 하지만, 2저 호황이라는 국제적인 환경도 뒷받침 된 시기이다.
    한국 술집의 역사에서 80년대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은 술집과 음향기계와의 결합, 술집과 노래의 결합, 성인쇼 술집의 확산, 여종원 술집의 대중화, 술집의 주택가 침투, 젊은 세대 전용 술집의 등장, 술집 인테리어의 고급화, 술집 공간구조의 변화 등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예전부터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저하게 대중화되는 것은 80년대부터이다.
    또한 80년대에는 성의 상품화 현상이 현저해졌다. 각종 퇴폐적인 성인 쇼의 범람, 여종업원이 술시중을 드는 카페의 주택가 침투, 술집 여종업원의 출신 성분의 다양화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성의 상품화가 현재해진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된 결과였다.
    야간 통행금지의 해제로 심야영업을 하는 술집이 확산될 수 있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경제적인 소비능력의 향상, 2, 3차로 이어지는 음주관행, 기업의 접대문화, 부동산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의 증가, 여가향유 능력의 미성숙, 성규범의 완화, 쾌락을 추구하는 가치관의 확산 등등의 요인이 복합된 것이었다.
    80년대에 들어 대중주인 막걸리의 소비량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맥주의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진, 보드카 및 위스키의 소비량이 급격히 늘었다. 특히 이때의 특징은 주류 소비의 고급화가 진행되었고 접대주의 비중이
    커진 점이다.




    값싼 호프집에서 최고급 룸살롱까지-카페

    80년대 술집 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 중에 하나는 카페라는 술집이 크게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전만해도 카페는 그저 차 마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휴식을 취하는 정도라고 여겨졌었다. 그러나 80년대부터 나타난 카페는 최고급 룸살롱에 비견할 수 있는 술집이 있는가 하면, 값싼 호프집의 형태를 띠는 것도 있고, 파는 술 종류나 안주, 인테리어, 영업장소, 경영방식, 종사하는 여종업원의 유형도 매우 다양해졌다.




    노래하며 술도 마시는 가라오케

    술과 노래가 결합된 형태의 술집은 80년대 중반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 시발점이 된 술집의 형태가 가라오케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술집은 룸살롱이나, 스탠드바, 일부의 나이트클럽 같은 데가 있었지만 이런 곳은 대부분 전문 악사들이 기타나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는데 맞추어 노래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손쉽게 기계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가라오케만큼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가라오케는 80년대 후반기에 번창 일로로 확산되다가 90년도 10월 6공화국이 시행한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 심야영업 단속이 이루어지면서 주춤하게 된다. 그러다가 90년대 초반기에 등장한 ‘노래방’은 가라오케 술집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고고장의 후신 디스코테크

    디스코테크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걸쳐 디스코 춤의 열풍이 밀려오면서 확산되기 시작한 새로운 유형의 술집이다. 과거 고고장이 변형된 이곳은 음반이나 테이프를 틀 수 있는 최소한의 시설을 갖추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술과 춤을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초기에는 약간의 입장료를 내면 음료수를 주고 술 없이 춤만 추는 곳으로서 젊은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술을 판매하는 디스코테크가 증가하면서 가격도 비싸지고 기성세대들이 점차 잠식해 들어간다.






    90년대에 들어서 우리나라의 음주 문화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1991년 주류의 수입 개방으로 세계의 술이 밀려왔다. 고급 위스키나 브랜디로부터 값싼 와인과 맥주에 이르기까지. 따라서 사람들은 세계 유수의 술에 대하여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편 해외 여행의 자유화로 사람들이 세계 각지의 음주 문화를 접할 기회가 늘어났다. 즉 우리의 음주 문화도 세계화되어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0여년간 성장과 개발 일변도로 치달아 온 한국 국민들은 점차 환경과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식(食)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제 음식에 대한 인식이 양에서 질로, 영양에서 다이어트로 변화하였다.
    술을 마실 때도 건강을 생각해서 덜 마시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마이카 붐(my car boom)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정부의 주류 정책에도 변화가 있었다. 1996년 모든 술에는 건강에 대한 경고 문구를 기재하도록 국민건강증진법에 규정하였다. 1993년에는 알코올 농도가 17% 이상인 술은 전파 매체(TV나 Radio)를 통한 광고 선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로바다야끼의 후신 - 소주방

    소주방 역시 음식메뉴에 있어서 종류와 가지 수는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칵테일의 대중화 전략의 일환으로 소주를 이용한 갖가지 칵테일을 개발하여 보급시킨 것이 한동안 소주방이 히트를 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대중 주점인 소주방의 활성화 직전에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일본 대중 주점 형태인 로바다야끼인데 로바다야끼의 국내도입이 소주방 형태의 주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래방의 대안 - 단란주점

    가라오케가 쇠퇴하고 단란주점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노래방이었다. 1991년 무렵에 부산에서부터 등장한 노래방(노래연습장)은 급속도로 전국에 확산됐다.
    그러나 술을 못팔게 되어 있는 노래방에서 불법적인 술 판매와 접대부까지 고용하면서 변태영업이 기승을 부리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단란주점이 등장하게 됐다.
    이러한 단란주점은 97년 IMF 환경 하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도 했지만, 경기회복에 따른 과소비 풍조에 편승해 2000년부터는 신규개업이 크게 늘어났다.
    국세청이 2000년 5월에 발표한 사업자등록 현황에 따르면 5월까지 각종 형태의
    술집개설을 위해 사업자등록을 한 사업자 수는 모두 4만808명으로 전년 동기(1만6435명)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이색지대 - 게이바

    사회구조가 다양화되고 개성화 되면서 동성연애자들도 서서히 자기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흔히 ‘동성연애자’ ‘호모’로 불리우는 게이들이 모여서 술 마시고 대화할 수 있는 술집이 생겨난 것이다.
    게이바(gay bar)는 말 그대로 남성동성연애자들이 출입하는 술집이다.
    지난 96년 보도된 한 신문에 의하면 서울의 경우 약 70여개의 게이바가 성행할 정도로 그 숫자도 많은 편이다. 이들 게이바는 주로 서울 탑골공원 뒷편 낙원동과 이태원 등에 산재해 있다.




    젊음의 탈출구 - 록카페

    나이트클럽에 식상했던 젊은이들은 90년대 들어와서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됐다.
    신촌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게 된 록카페는 ‘부킹하자’고 손목을 잡고 다른 테이블로 달려가는 웨이터나 화장실에서 간단한 안마와 수건 제공, 싸구려 드링크의 제공으로 팁을 챙기려는 얄팍한 상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양질의 음악’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나이트 클럽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장소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기존 카페의 테이블 사이에 공간을 넓히고 귀청을 찢을 듯한 록음악과 사이키조명으로 분위기를 조성해 싼값에 앉은자리에서 술과 춤을 즐길 수 있도록 한 록카페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개성의 상징 - 신세대 카페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가속화된 계층차별화 현상과 연령차별화 현상은 소비주의와 접목되면서 90년대 중반기에 오면 더욱 다양한 형태의 술집을 탄생시킨다. 그것의 상징적인 것이 속칭 ‘신세대 카페’이다. 이 카페는 젊은 신세대층이 주고객으로 주로 외제면세품 맥주를 파는 술집이다.
    이 술집은 어떤 의미에서 신세대의 특징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술집이다. 신세대의 중요한 특징인 집단주의적인 구속에서의 탈피, 전통주의의 거부, 개성존중, 다원주의 등의 현상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경향은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대학가 앞에 등장한 칵테일 전문점, 편의방, 록클럽, 재즈클럽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취향에 따라 즐기는 칵테일 전문점

    신촌, 압구정동, 홍대입구, 화양리 등 유흥가에서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한 칵테일바는 예전의 레게바, 스포츠바를 압도하면서 급속도로 확산됐다.
    능숙한 입담과 현란한 플레어(칵테일을 만드는 손동작) 묘기로 손님을 끄는 바텐더가 신종 인기직종으로 등장했으며, 이런 바텐더들이 실력을 겨루는 대회까지 생겨났다.
    칵테일바의 등장은 기존의 술문화와는 대립적인 어떤 것을 보인다. 즉 전통적인 술 문화에 의하면 술은 취할 때까지 2차, 3차를 가는 것이고, 술잔을 돌려가며 마시는 것이다. 그러나 칵테일바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술을 선택하고, 술잔은 돌릴 수가 없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자기개성의 추구라는 일면이 들어 있는 것이다.






    2000년의 출발은 20세기와 결별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999년의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사람들은 밝아오는 21세기에는 전혀 새로운 비전과 상황들이 전개되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아 축포를 터뜨리기에는 IMF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고 사람들은 아직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전반적인 경기침체 속에서 술집들도 대부분 불황을 겪었는데, 일부 고급 주점이나 나이트클럽 등 호화판 업소는 그런 것과는 아랑곳없이 성행하는 대조를 보였다.
    젊은층을 위한 술집은 그들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더욱 세분화 되고 있다. 소주방에 이어 소주바 스타일의 업소가 등장했으며, 카페바, 클래식바 등 기존의 요란한 음악 대신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바가 선을 보였다.
    또한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스포츠바나, 바텐더가 마술을 부리며 손님을 끄는 매직바, 포장마차 형식의 텐트바 같은 이색바들이 신세대들이 많이 가는 곳에 모습을 들어냈다.
    세기가 바뀌면서 떠오른 또다른 키워드는 바로 ‘복고’이다. 드라마나 CF, 패션, 상품 등 전 분야에 걸쳐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분위기가 우리 사회 전반에 유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술집도 청춘극장, 학교종이 땡땡땡, 장군의 아들 등 복고풍의 이름을 달고 실내도 60~70년대 풍으로 인테리어를 꾸민 집들이 많이 늘어났다.




  • 수수허리 2016/03/30 16:30 # 삭제 답글

    한국의 인명사전에 인번(仁番)은 백제 인으로 별명이 수수허리(須須許理)이고 수증기리(須曾己利)라는 별명도 있다. 그는 야마토의 응신(應神)때 진조(秦造)의 조로 술을 잘 빚었다. 성씨록(姓氏錄)에는 야마토 인덕(仁德)대에 한국에서 와서 술을 잘 빚어 주효랑?(酒肴郞)이라는 성을 받은 증증보리(曾曾保利)와 같은 인물로 봄<출전 고사기(古事記)>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인번[(仁番: 별명이 수수허리(須須許理.수수고리)]는 '고사기'에 의하면 백제 사람으로 응신천황15년(284) 때 일본을 건너가 술 빚는 기술을 발전시켜 어주를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그는 당시 진조의 조(秦造之祖) 한직의 조(漢直之祖)와 함께 왔다.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의하면 인덕천황 (313-399)대에 한국에서 형증증보리(兄曽曽保利.수수호리) 여동생증증보리(妹曽曽保利.수수호리) 두 사람이 왔는데 모두 술을 빚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어주를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뒤에 (형은)마려(麻呂)라는 성을 받고 호를 '주간도자(酒看都子)'라고 했다. 그리고 (여동생은)성을 산록비(山鹿比:여자이름)를 하사하고 호를 '주간도녀(酒看都女)'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주간도(酒看都)'를 성으로 했다. 인번(仁番)과 증증보리(兄曽曽保利)는 동일인으로 보이나 고사기와 신찬성씨록의 두 일본기록의 두 연대가 100~120년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의하면 형증증보리(兄曽曽保利)와 여동생증증보리(妹曽曽保利)는 일본의 주신(酒神)으로 제사를 지내고 신사도 있다]

    <2013.12.29. 박정주(朴正柱) jung joo park. 古事記. 日本書紀. 新撰姓氏錄, 人物辭典, wikipedia 등 기록을 참고하여 작성>
  • badoc 2017/10/12 14:53 # 답글

    -우리나라 술의 진화와 소주의 역사
    [서울경제]


    외국 술 지식은 술술, 토종 술은 깜깜 나 자신을 모르면 남도 알 수 없듯이 느릿느릿 빚어지는 우리 술에 취해봐야

    여태껏 술을 얼마나 마신 걸까. 취중에도 하지 못한 생각이 해가 중천일 때 떠오른다. 삼총사·삼세판·삼발이···. 수학적 완전수는 6이지만, 현실에서 가장 조화로운 숫자는 3이다. 이런 말장난 같은 핑계로 1주일에 술을 세 번은 마신다. 한 술자리에서 소주 두 병이 적당하다. 한 병은 아쉽고 세 병은 과하다. 1년이면 312병이다. 음주 경력이 18년이니 5,616병이 몸을 타고 흘러갔다. 대략 2,022리터. 욕조 10개 분량의 술을 들이켰다. 주당이라는 말을 들어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다.

    한국인들은 술을 사랑한다. 지난해 국내 소주 소비량은 34억 병이다. 공식적으로 술을 마셔도 되는 나이는 만 19세 이상이다. 한국의 어른 수는 4,015만 명이다. 한 사람당 1년에 85병의 소주를 소비했다. 하루 0.23병 꼴이다. 헛헛한 삶의 한편을 술로 채워 온 한국인들이다.

    이제 한국인들은 대학생·직장인 할 것 없이 바다 건너온 술 문화도 제법 즐길 줄 안다. 까르베네 쇼비뇽·쉬라즈 같은 와인 품종을 읊거나 싱글몰트 위스키의 매력을 떠들어대기도 한다. 금주법 시대와 칵테일의 역사, 니가타·아키타의 사케 얘기로 지식 보따리를 풀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술에 대한 얘기는 없다. 희석식 소주와 밋밋한 맥주 맛에 길들여진 탓일까, 아니면 단일품목 대량생산하기 때문일까. 압축 성장기를 거치며 한국 술은 역사와 문화를 거세당한 느낌이다. 나를 모르면 남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토종 술에 대해 모르는데 외국 술에 대해 자신 있게 떠들 수 있겠는가. 느릿느릿 빚어지는 한국 술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재미 아니겠는가.

    신윤복, 주사건배(주막풍경)
    신윤복, 주사건배(주막풍경)
    고구려 등 삼한 군중대회 밤낮으로 술 즐겨 지주 빚어 마셔 전쟁에 승리했다는 이야기도 한민족 술사랑 고문헌에 잘 나타나 있어 ◇술과 함께한 민족=우리나라 술은 농경이 시작되는 삼한시대에 접어들면서 지금과 같은 곡물을 이용한 곡주(穀酒)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 등 삼한에서 자연에 대한 재앙을 막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 위해 벌인 영고, 동맹, 무천의 군중대회 때 밤낮으로 마시고 즐겼다고 하니 당시부터 이미 대규모의 술 만드는 기술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대무신환 편에서는 ‘지주(旨酒)’를 빚어서 그 효력으로 한나라의 요통태수를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문헌에 쓰여 있는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은 술과 함께 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술 문화가 상당히 발달했던 시기다. 이미 술이 상업적으로 판매되기도 했으며 통일신라 때에는 술이 특수 계층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 의해 양조됐다. 삼국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중국과 수차례 전쟁을 치렀는데 이 시기에 문명의 교류가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려시대에는 체계적인 양조술이 정착됐고 누룩 제조법·각종 약주 제조법도 크게 발달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마다 유명한 토속주가 뿌리 내렸다. 대표 팔도 명주로는 경기 삼해주, 충청 소곡주, 평안도 벽향주, 영남 과하주, 호남의 호산춘 등이 있다. 구한말 주세 제도가 실시되면서 가정에서 술을 만드는 것이 금지됐다. 토속주들이 자취를 감춘 원인이다. 광복 이후 일부 민가에서 제사·혼사·회갑연 등에 사용하는 술을 밀조해 온 것이 그나마 토속주의 명맥을 이어주고 있다.


    기원전 3000년경 중동 아랍서 소주 탄생 몽골 서정군 정벌 통해 한반도에 전파 일본 희석식 소주 본따 현재의 소주로

    ◇서민의 벗 소주=소주는 곡물이나 과실을 발효시켜 증류한 고농도 증류주다.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오늘날까지도 중동 아랍 지역에서 ‘아라끄’란 이름으로 우윳빛 소주가 전승되고 있다. 몽골 서정군(西征軍)이 1258년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을 공략할 때 아랍인들로부터 그 양조법을 배웠다. 이후 일본 원정을 위해 한반도의 개성과 안동·제주도 등지에 주둔하면서 이 술을 빚기 시작했다. 몽골 원정군이 가죽 술통에 넣고 다니면서 마시는 ‘아라끄’를 공급하기 위해 고려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고려 소주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승돼 오면서 한국 3대 토주(土酒)의 하나가 됐다.

    현재의 우리나라 대중주 소주는 일본 희석식 소주를 본뜬 것이다. 1965년 정부가 식량 확보 차원에서 곡류로 소주를 제조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이후 고구마 등을 발효시켜서 주정을 만들고 이것을 희석하여 제조했다. 희석식 소주에는 감미료 등 수십가지의 조미료가 들어간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달콤 쌉싸름한 맛이 난다. 희석식 소주와 달리 전통 소주는 쌀·보리 등 곡류를 원료로 하며 누룩을 사용한 증류한 술이다. 향이 강렬하고 톡 쏘는 맛을 갖추고 있다.

    을지로 동원집
    을지로 동원집
    동원집 감자국
    동원집 감자국
    서울 참이슬·강원 처음처럼·부산 씨원 등 지역별 특색 살린 소주 수십여종 달해 ◇희석식 소주 종류와 안주= 참이슬·처음처럼. 고유명사처럼 불리는 소주 브랜드다. 서울 여느 포장마차나 고깃집에서 초록병을 흔드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지역마다 차이를 살펴보면 더 재미있다. 부산에서는 “씨원 주이소” 광주에서는 “잎새주 달랑께” 한다. 지역마다 맛과 향이 다르며 종류도 다양하다. 가수 김건모처럼 떠나는 지역별 소주기행도 인생의 낙이요, 술을 마시는 재미다.

    대한민국 소주 브랜드의 대표주자는 서울의 진로 ‘참이슬’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0월 세상에 나와 실의에 빠진 많은 중년들을 달래줬다. ‘참이슬’는 지난해 1조원 어치나 팔렸다. 이제는 싱가포르 국제공항 면세점에도 당당하게 입점됐다. 소주 한류의 주인공이다. ▲강원도 ‘처음처럼’ ▲충북 ‘시원한 청풍’ ▲충남 ‘오투린’ ▲전북 ‘하이트’ ▲전남 ‘잎새주’ ▲대구 ‘참소주’ ▲경남 ‘화이트’ ▲부산 ‘씨원’ ▲제주도 ‘한라산’ 등은 지역 대표 선수들이다.

    ‘자몽에이슬’‘순하리 처음처럼’처럼 단맛을 즐기는 여성들의 입맛을 겨냥해 옷을 갈아입은 소주도 제법 많이 나오고 있다. 소주는 삼겹살과 찰진 궁합을 자랑한다. 소주의 알싸한 뒷맛을 삼겹살의 기름기가 눌러준다. 입안에서 부서지는 삼겹살 사이로 퍼지는 달달한 소주 맛이 또 삼겹살을 부른다. 때로는 안주가 소주 맛을 책임진다. 한 잔 주량의 초짜라도 좋은 안주를 만나면 소주가 술술 들어간다.

    소주에는 고기와 찌개류가 잘 어울린다. 보쌈·족발·감자탕·매운탕·곱창·육회·골뱅이···. 기름기 살짝 오른 회와 쫄깃한 해산물도 참 좋은 짝꿍이다. 짜고 맵고 후루룩 넘어가는 라면은 말초적인 안주다.

    서울의 낡은 공간 을지로·충무로 뒷골목엔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가게들이 많다. 대표적 음식점으로는 감자국이 유명한 노포인 ‘동원집’ 근처엔 대창 순대로 명성이 자자한 ‘산수갑산’이 자리하고 있다. 매운 코다리찜과 소고기전이 일품인 ‘우화식당’도 찾아가볼만 하다.

    /김은강·김민혁기자 kawa0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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