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월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參戰略史 ROKmarine




파병과 주요작전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귀신잡는 해병대', '신화를 남긴 해병대'등 해병대와 관련된 표어(slogan) 한 두마디를 모르는 성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해병대의 특성과 기질, 나아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는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는 상징도 많지 않다. 대부분의 표어들이 6·25전쟁 등 위기상황에서 치열한 전투를 겪으면서 만ㄴ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표어는 좀 더 특별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바로 44년전 오늘 즉, 1967년 2월 15일 아침 베트남의 짜빈동에서 한국해병대 제2여단 제11중대의 전투현장을 둘러 본 외신기자들이 붙여준 애칭이기 때문이다.

해병대의 주둔지역

1965년 10월 9일 아침 베트남 중남부 깜란항에 첫 발을 내딛었던 해병대 청룡부대(제2여단)는 즉각 항구 일대의 평정작전에 돌입했다. 이어 그해 12월 말 미군의 요청에 따라 남베트남의 곡창지대 뚜이호아 평야지대를 평정했다. 그리고 1966년 8월 세 번째의 주둔지역으로 이동했는데 그 곳이 바로 짜빈동전투가 수행됐던 쭈라이(Chu Lai)지역이었다. 남베트남 제1군단의 책임지역이다. 이어 1967년 12월 네 번째로 호이안(Hoi An)에 진출해 1972년 철수할 때까지 주둔했다.

그 중에서도 세 번째의 쭈라이지역은 어느 곳보다도 베트콩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다. 군사분계선과 근접해 있어 북베트남 정규군의 침투도 용이했다. 따라서 그 곳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언제, 어느 곳이라도 청룡부대의 기지를 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해병대의 주둔지역

④ 비룡작전(67.12.22 ~ 68.1.29)
•- 미군의 케산전투 병력공백 보안
•- 호이안시 전투(68.4.30 ~ 2.7)
•- 베리아 상륙작전(69.9.5 ~ 9.28)

③ 북극성 작전(66.8.16 ~ 9.23)
•- 미 해병 제3상륙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한 작전지역 이동
•- 짜빈동 전투(67.2.14 ~ 15)

② 청룡1호 작전(65.12.16 ~ 66.1.16)
•- 빈딘성 뚜이호아로 이동
•- 한국군 최초의 연대급 작전
•- 곡창지대, 1번 도로 개통

① 깜란항 상륙(65.10.3 ~ 10.9)
•- 최초 3개대대로 편성
•- 제2대대 5중대 까두산전투(11.4)
•- 판랑 비행장 감제고지 장악

해병대의 주요 전투


깜란지역(65.10. 3-12. 15)
•① 부산항 출항과 깜란항 상륙 : 1965. 10. 2일, 미 해군 수송선 ‘가이거’호와 ‘엘 틴저’호에 승선하여 10. 3일 부산항 제3부두를 출항했다. 10. 8일 캄란 만에 도착 한 후 10. 9일부터 14일까지 상륙을 완료했다. 최초 주둔지는 여단 본부 와 제2·3대대는 Thon Hoa Da 일대에(CP0222), 제1대대는 깜란 반도 Ao Ho 산 서측(CP 0715)에서 각종 보급 및 지원시설을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여단 주둔지는 차후 제9사단 30연대에게 인수하였다.
•② 까두산(Nui; 山 Ca Du) 작전 : 1965. 11. 4일, 제2대대 5중대는 캄란으로부터 남쪽으로 70km떨어진 판랑에서 부숑비행장 건설을 위협하는 까두산 일대의 적 을 공격하여 정상을 점령하였다.

뚜이호아지역(65.12. 15-66. 10. 9)
•① 뚜이호아 : 남베트남 중부의 요충지인 퓨연 성의 성도이면서 남베트남 3대 곡 창지대 중 하나로 중부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적의 식량 보급 기지 역할이었다.
•② 청룡 1호 작전(65. 12. 16∼66. 1. 16) : 제2대대가 뚜이호아 북쪽지역을 장악 한 후, 여단(-1)은 남쪽 및 서쪽을 장악하였다.
•③ 해풍작전(66. 7. 22∼8. 17) : 66. 8. 11일, 제3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가 미테마을의 동굴진지 작전 수행시 적이 투척한 수류탄을 막고 산화하였다.

추라이지역(66. 8. 18-67. 12. 21)
•① 추라이 : 남베트남 제2의 도시인 다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지역
•② 강구작전(66. 1. 31-2. 3) : 제1대대 3중대 3소대가 바딴간 반도의 수로 탐색 작전시 적의 포위망을 탈출시 위생하사관이었던 지덕칠하사가 분대를 구출하고 본인은 전사(태극무공훈장 수여)
•③ 짜빈동 전투(67. 2. 14∼2. 15) : 짜빈동 전투 참조
※ 해병대 증파 : 1967. 7월, 제5대대


호이안지역(67. 12. 21-72. 1. 21)
•① 호이안 : 1967년 말 케산전투 준비를 위해 다낭 남쪽 지역의 방어태세 보강을 위해 이동(호이안을 중심으로 북쪽에 제1, 5대대, 남쪽에 제2, 3대대를 배치)
•② 괴룡작전(68. 1. 30-3. 13), 승룡 7-21호 작전(69. 1. 10-1. 21), 베리아 상륙 작전(69. 9.5-9. 30), 황룡 2호 작전(70. 4. 1-4. 15) 등
※ 철수 완료 : 1972. 2. 19


해병대의 전과

파병기간 6년 5개월 동안 여단급 작전 66회와 대대급 작전 109회를 비롯하여 소 부대 작전 151,347회를 통해 적 사살 9,619명, 포로 및 귀순 1,256명 등 혁혁한 전 과를 올렸다. 또한 8,810톤의 구호 활동 및 대민 진료, 403,729명에 대한 교육 지 원, 1,593동의 건설 지원, 450,064명의 친선 활동 등 대민 봉사활동을 전개함으로 써 3회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비롯하여 1회의 미 대통령과 남베트남 대통령의 표창 을 받았다. 그러나 청룡 부대 또한 전사자 1,156명, 부상자 2,702명의 손실이 있었다






청룡부대 (해병 제2여단)
The 2nd Marine Brigade

1965년 6월28일 국방부 지령 8호에 의하여 해병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해병 제2여단을 편성하였으며 초대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이 임명되었다. 65년 9월20일 경북 포항에 위치한 해병기지에서 제 2여단 결단식을 거행되고,
1965년 10월9일 파월 전투부대로써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1965년 12월16일 투아호아 지역으로 이동하였고1966년 8월17일에는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 67년 12월22일에는 호아안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여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해병 제2여단은 한국군 최초 전투부대로 파월된 다음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수많은 대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중 주요작전으로는 Tuy Hoa에서 청룡작전을, Chu Lai지역에서는 Tra Binh Dong 전투를, 그리고 Hoi An 지역에서는 괴룡작전, 승룡작전, 황룡 작전을 수행하면서 지역내에서 암약,출몰하는 적을 섬멸하여 Quang Nam 성 지역들을 평정하였다.

파 월 :

1965. 9. 20 경북 포항에서 출범, 1965. 10. 3 한국을 떠나
1965. 10. 9 캄란에 상륙.
1967. 12. 12부터는 호이안에 주둔.

사 령 관 :이봉출 여단장의 뒤를 이어 김연상, 이동호, 이동용, 허홍 준장

참전기간 : 1965. 10. 9 - 1972. 2. 24

참전군인 :37,340명 (장교 2,166명, 사병 35,174명)

희 생 : 전사 1,202명 (장교 42명, 사병 1,160명) 부상 2,904명 (장교 99명, 사병 2,805명)

전 투 :

151,522회 (대부대 전투 175회, 소부대 전투 151,347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으로써 귀신잡는 해병의 맹위를 베트남에서 보여 주었다.1967년 2월14일 밤부터 15일까지

사투를 벌인 짜빈동 전투는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화중에 신화로써 한국 해병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큰 몫을 했다.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따이한로라고 불리는 다낭에서 호이안간의 도로건설과 많은 대민 지원사업을 실시하여 한월간 친선을 도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덧글

  • 짜빈동 2017/06/19 11:01 # 삭제 답글


    두산백과

    짜빈동전투

    [ Battle of Tra Binh Dong, -戰鬪 ]


    요약베트남전쟁 중인 1967년 2월 14일과 15일 사이에 베트남 짜빈동에서 벌어진 한국 해병대와 북베트남군 간의 전투.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대한민국 해병 제1사단 제2연대(청룡부대)는 1966년 8월 추라이 지구로 이동하였다. 제2연대 제3대대 제11중대는 추라이 지구의 짜빈동(Tra Binh Dong)에 배치되어 전술기지를 구축하였다. 당시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는 적의 야간 기습에 대비하여 사주 경계를 강화하고 48시간 이상 자체 방어할 수 있도록 탄약과 식량 등을 비축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월맹군)은 추라이 공군기지와 청룡부대 포병대대의 포진지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을 세웠는데, 포진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짜빈동에 주둔한 11중대를 먼저 공략해야만 하였다. 구정(舊正) 휴전 기간이 끝난 1967년 2월 14일 북베트남군 제2사단 제1연대 제60대대와 제21연대 제40대대, 쾅나이성 게릴라 1개 대대 등 2400여 명이 짜빈동 부근에 집결하였다. 같은 날 오후 11시 20분경에 아군의 청음초(聽音哨)가 적의 접근 기척을 보고하여 비상 태세가 발동하였고, 일제사격으로 적 1개 소대 병력을 퇴치하였다.

    일단 물러난 북베트남군은 2월 15일 새벽 4시경부터 대대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3개 대대 이상의 2400명이 넘는 적군은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인해전술로 파상 공격을 가하였다. 이에 맞선 제11중대 병력은 장교 10명과 사병 284명 등 총 294명에 불과하였다. 여단에서 헬리콥터로 병력을 수송하여 지원하려고 하였으나, 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지원부대가 헬리콥터로 투입되는 동안 포사격을 중지하면 적의 진지 돌입을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제11중대는 포병 화력을 집중하여 적을 쓰러뜨렸고, 근접전투와 백병전을 펼치며 기지를 사수한 끝에 적을 격퇴하였다.

    4시간이 넘는 혈투 끝에 제11중대는 적 확인사살 243명, 추정사살 60명, 포로 2명, 체코제 화염방사기 3문, 대전차 유탄발사기 5문, 기관총 2정, M15소총 11정, M56자동소총 17정, 각종 실탄 6000여 발, TNT 100개, 탄창52개, 기관단총 7정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아군은 전사 15명, 부상 33명의 희생을 치렀다. 제11중대 장병 전원은 일계급 특진을 하였고, 중대장과 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전투는 1개 중대 병력으로 연대 규모의 적을 물리침으로써 한국 해병의 용맹을 떨쳤을 뿐 아니라, 맹호부대의 두꼬전투와 더불어 한국군 중대전술기지의 전략적·전술적 가치를 확인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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