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 기념비...어제와 오늘의 시각 ROKmarine



VA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 가시화

올 여름 VA 콴티코 기지 인근 부지 구입
중공군 인해전술 맞서 미군 2836명 전사
영화 ‘국제시장’ 흥행으로 동포사회도 관심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5/02/03 05:10


피란민 10만 명을 구한 흥남철수를 가능하게 한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이 가시화되고 있다.

한국 전쟁 당시 해병대 소속으로 장진호 전투에 참전해 중공군과 싸운 스티븐 옴스테드(Steven G. Olmstead·사진) 예비역 중장 등 한국전참전 노병들이 버지니아 콴티코 해병대 기지 인근 공원에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Stephen Olmstead
옴스테드 장군은 2일 전화인터뷰를 통해 “올해 여름쯤에는 기념비 건립 부지를 구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등 매우 협조적”이라며 “정확하게 어느 정도 금액을 투자했는지 말하기는 조금 곤란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미국에서 장진호 전투 기념비가 건립된 곳이 몇 군데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대부분은 묘비 수준의 크기”라며 “버지니아에 건립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 때문에 의미는 더욱 크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국 국회는 지난해 11월 3억 원 규모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 예산안을 폐기했었다. 한국 5억 원, 미국 1억 원 등 총 6억 원을 들여 짓기로 한 기념비 건립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의 반대로 백지화된 것이다. 미국에 이미 3개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가 있다는 게 예산 삭감의 이유였다. 하지만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등의 반발로 기존 예산의 절반인 1억 5000만 원만 승인받았다.

미국에 있는 3개의 장진호 기념비는 모두 미국인들이 자비를 모아 만들어진 기념비다. 한국에서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장진호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애국단체총협의회(상임의장 이상훈)가 1억 원 목표의 국민 성금 모금 행사를 진행 중이다.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이 한 몫을 했다. 국제시장의 배경인 흥남 철수를 있게 한 전투가 장진호 전투이기 때문이다. 장진호 전투는 12만 명의 중공군을 1만여 명의 미 해병 1사단이 막아내며 철수를 가능케 한 전투다. 장진호 전투로 미군 2836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중 절반가량은 동사했다. 당시 중공군 전사자는 2만 5000명, 부상 1만 2500명으로 사실상 무력화됐다. 흥남 철수로 민간인 10만 명이 탈출했다.

워싱턴·볼티모어 한인사회에서도 ‘국제시장’의 흥행을 계기로 장진호 기념비 건립을 후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인단체와 향군단체 관계자는 “다른 지역도 아니고 미국에서 세번째로 큰 한인사회 인근에 장진호 전투기념비 설립이 추진되고 있어 반갑다”라며 “올해는 해방 7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인데 대한민국 독립에 도움을 준 미군에 감사하는 의미로 장진호 전투기념비 설립을 돕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영남 기자


Olmstead, Stephen G

Published: 26 Mar 2008 ::: Last Updated: 24 May 2010 ::: Views: 7,045Printer Friendly


LtGen Stephen Olmstead USMC (ret)
President YPF Foundation

LtGen OlmsteadLieutenant General Stephen G. Olmstead was the former 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Defense for Drug Policy and Enforcement and the Director of the Department of Defense Task Force on Drug Enforcement, Washington, D.C.

General Olmstead was born in Albany, N.Y., November 10, 1929 and graduated from Bethlehem Central High School in 1947. He attended Champlain College in Plattsburgh, N.Y., and holds a B.S. degree in Military Science from the University of Maryland (1963) and an M.S. degree in International Affairs from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1970).

Enlisting in the Marine Corps in August 1948, he participated in the Korean Conflict as a squad leader with the 3d Battalion, First Marines, 1st Marine Division. He attended The Basic School, Quantico, Virginia, and was commissioned a second lieutenant in June 1951.

General Olmstead remained at Quantico and served consecutively as a platoon leader and a company executive officer of the Demonstration Troops until January 1953. He also attended the U.S. Naval Justice School, Newport, R.I., during this period. He was promoted to first lieutenant in October 1952. General Olmstead then served as Executive Officer Marine Detachment, aboard the USS NORTHHAMPTON, until October 1954, when he was transferred to Manchester, N.H. as Inspector-Instructor, 18th Rifle Company. He was promoted to captain in March 1954.

In October 1957, he was ordered to Camp Lejeune, N.C., and served as Assistant S-3 Officer, 2d Battalion, Eighth Marines, 2d Marine Division. In January 1958, he was reassigned as a company commander, 2d Reconnaissance Battalion, 2d Marine Division, and attended the Advanced Infantry School, Fort Benning, Ga., from July 1959 to May 1960.

General Olmstead was assigned to Camp Butler, Okinawa, as Assistant S-4 Officer. He returned to the United States in July 1961, and served as an instructor at the U.S. Army Intelligence School, Fort Holabird Md. He was promoted to major in September 1961.

Transferred to the 2d Marine Division, Camp Lejeune in July 1964, he served as S-3 Officer, and S-2 Officer, Sixth Marines. During this tour he also served as Operations Officer of the 6th Marine Amphibious Unit and Regimental Landing Team-6 in the Dominican Republic. In May 1966, he was ordered to the Republic of Vietnam and served as the command briefer at the U.S. Military Assistance Command. He was promoted to lieutenant colonel in October 1966.

General Olmstead was assigned as an operations officer on the Joint Strategic Target Planning Staff, Offutt Air Force Base, Neb., in May 1967. He then attended the Naval War College. Newport, R.I., graduating as a "Distinguished Graduate" in June 1970. Upon completing the course, he reported to Headquarters Marine Corps, Washington, D.C, as a branch head in the G-3 Division. He was promoted to colonel in September 1971.

In July 1973 he was ordered to Okinawa, and served as Regimental Commander, Ninth Marines, 3d Marine Division. He remained in that billet until May 1974, when he was transferred to the staff of the Commander, 6th Fleet, in Gaeta, Italy, as the Fleet Marine Officer. He was advanced to brigadier general on April 1, 1976 and assigned duty as Director, Development Center, Marine Corps Development and Education Command, Quantico, Va., on June 15, 1976. During the period Jan. 1, 1977 to May 8, 1977, he was assigned additional duty as Deputy Chief of Staff, Research, Development and Studies, Headquarters Marine Corps.

General Olmstead was advanced to major general on May 23, 1978 and was assigned duty as Commanding General, Marine Corps Base. Camp Pendleton Calif., on June 30, 1978. He assumed duty as the Commanding General, III Marine Amphibious Force/Commanding General, 3d Marine Division, FMF, Pacific, Okinawa, Japan, in July 1980. On June 29, 1982, he was assigned duty as the Deputy Chief of Staff for Reserve Affairs, Headquarters Marine Corps. He served in this capacity until he assumed the duties as Commanding General, Marine Corps Recruit Depot/Commanding General, Eastern Recruiting Region, Parris Island, S.C., in July 1984. He served in this capacity until his retirement on July 1, 1986. In October 1986, General Olmstead was recalled from the retired list and assigned with Senate confirmation to serve as the Deputy Assistant Secretary of Defense for Drug Policy and Enforcement and the Director of the Department of Defense Task Force on Drug Enforcement. General Olmstead was promoted to lieutenant general on March 25, 1987.

General Olmstead's decorations and medals include: the Distinguished Service Medal; the Legion of Merit; Bronze Star Medal; Joint Service Commendation Medal; Navy Commendation Medal; Army Commendation Medal; Presidential Unit Citation; Navy Unit Commendation; and the Republic of Korea Cheonsu Medal.

Lieutenant General Olmstead and his wife, the former Vera L. Mead of Bucyrus, Ohio, have three children, Barbara J. (Mrs. Theodore R. Schneble), Elizabeth A. (Mrs. Michael L. Love), and Stephen G. (a Marine offi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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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춘이 만든 장진호 전투비.. 대통령의 첫 訪美행사 '아이러니'

이민석 기자 입력 2017.06.28. 03:10 수정 2017.06.28. 10:32 댓글 7개



[민주당이 野시절 반대했는데.. 文대통령 '혈맹 강조' 상징으로]
- 박승춘에 태클 걸었던 민주당
기념비 예산 올리자 '전액 삭감'.. 난항끝에 3억 지원돼 美에 건립
- 6·25때 '장진호 전투'는
美해병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싸움
중공군 막아 흥남 철수작전 가능.. 文대통령 부모도 이때 南으로 와



문재인 대통령은 28일(현지 시각) 한·미 정상회담 첫 번째 일정으로 미 버지니아주(州) 콴티코 해병대 국립박물관에 있는 장진호(長津湖) 전투 기념비를 방문해 헌화할 예정이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26일 "장진호 전투는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이번 행사는 한·미 관계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미 정상회담의 첫 단추를 '혈맹(血盟)' 강조로 시작하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번 문 대통령 방문 행사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아이러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는 이른바 '적폐 인사'로 지목돼 문재인 정부 들어 1호로 경질됐던 박승춘 전 보훈처장이 민주당 반대 속에 추진했던 사업이기 때문이다. 야당 시절 민주당은 장진호 기념비 건립을 위한 예산 편성에 반대했었다.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의 미 해병대 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 /연합뉴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6일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북진(北進)했던 미군 해병 1사단 등 1만3000여 명이 중공군 12만명에게 포위되면서 큰 피해를 입은 전투다. 미 해병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당시 미군은 영하 3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에서 철수 작전을 벌이다 1만4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들이 중공군 포위를 뚫기까지 17일이 걸렸다. 하지만 이들이 중공군 남하를 막아낸 덕분에 북한 주민 20만명이 남한으로 피란한 '흥남 철수 작전'이 가능했다. 함경남도 흥남 출신인 문 대통령 부모도 이때 흥남 부두에서 7600t 급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몸을 싣고 탈출했다.

이런 의미를 담은 장진호 전투 기념비는 2013년 미국 참전 용사들이 나서서 모금을 시작하며 건립이 추진됐다. 당시 박승춘 보훈처장이 우리 정부 지원을 주도했고 2년 뒤인 2015년 7월 기공식을 가질 수 있었다. 총 건립 비용 60만달러(약 6억8000만원) 중 우리 정부 예산 3억원이 투입됐다. 대선 직전인 지난달 4일 한·미 양국 정부 인사들이 참석한 기념비 제막식도 열렸다. 아버지가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던 조셉 던퍼드 미 합참의장과 미 각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했고, 한국 측에선 정부 대표로 박 전 처장과 6·25 참전 용사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6·25전쟁 당시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미 제1해병사단 대원들은 혹한에서 철수 작전을 벌이다 1만400여 명 사상자를 냈다. 당시 해병대원들이 부상당한 동료들을 후송하는 사진. /Getty Images 코리아



하지만 정부 예산 3억원이 투입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박 전 처장 주도로 2015년도 예산안에 기념비 건립 예산 3억원을 편성해 국회에 넘겼다. 그러나 2014년 말 국회 심의 과정에서 제1 야당(野黨)인 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반대에 가로막혔다. 당시 민주당은 "미국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가 이미 3개나 있다"며 예산 편성을 반대했고 정무위에서 전액 삭감됐다. 당시 민주당 소속 김기식 예산심사소위 위원장은 "이 예산 편성은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당시 민주당의 반대 이유에 대해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기념곡 지정에 반대하는 등 보수 성향이 강한 박 전 처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는 해석도 있었다.

이에 박 전 처장은 당시 정우택 국회 정무위원장을 찾아가 "어떻게 이런 예산을 깎느냐"며 서류를 던지고 항의하기도 했다. 보훈처 측은 "3개 기념비는 미국인들이 모금해 세운 것으로 우리 정부가 세우려는 기념비 예산 삭감의 이유로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논란 끝에 여야는 예산 3억원을 2년에 걸쳐 나눠서 정부 예산에 반영하기로 합의했고 기념비 건립으로 이어졌다.

문 대통령은 취임 다음 날인 지난달 11일 일괄 사표를 제출한 전(前) 정부 임명 국무위원과 정무직 공무원 가운데 박 전 처장에 대해서만 사표를 수리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2월 임명돼 최근까지 6년여간 재임한 박 전 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齊唱) 불허, 색깔론 발언 등으로 여러 차례 민주당 반발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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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 바로가기참좋은세상으로2017.06.28 09:19
조ㅗ선일보는 폐간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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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 바로가기intense2017.06.28 10:45
친일로 나라 팔아먹고 광복후 독재세력에 부역하며 온갖 특혜속에 살아오면서 민주화 과정에서 그토록 민주화 세력들을 비방하고 공격하더니 결국 민주화 된뒤엔 자기반성 한줄없이 민주주의 국가의 언론자유를 맘껏 누리며 호의호식하며 살아가고 있는 좃선의 행태가 진짜 아이러니하다.지난4월 박승춘이가 자기 이름 새길려고 대전, 서울, 대구, 부산 등 보훈병원 4곳에 개당 1천5백만 원짜리 표지석을 세웠다. 이 돈은 보훈 가족을 위한 예산을 전용한 것인데 그런 기사는 한줄도 안쓰는 더러운 좃선 기레기들! 퉷퉷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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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 바로가기sammy2017.06.28 13:48
조선일보는 대통령의 방미성과가 좋을 것 같으니깐 벌써부터 초를 치는구나.조선일보는 우리나라 외교 성과보다 일본을 위해 논란을 만드는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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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badoc 2017/06/30 04:27 # 답글


    제48주차 시사안보-장진호 전투의 교훈
    이제부터 후방으로 진격한다2013. 11. 22 16:15 입력 | 2013. 11. 24 18:11 수정

     지난 19일, 美 뉴스전문 채널 CNN은 “미국 해병대 창군 이래 최초로 세 명의 여성이 해병대 보병훈련과정(Infantry Training Course)을 수료했다”고 보도했다. 美 해병대의 ITC는 12주의 신병훈련을 마친 해병 전투요원들이 또다시 이수해야 하는 59일간의 필수과정으로, 엄격한 체력검사와 혹독한 훈련으로 정평이 나 있다. 장병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체계적인 전투기술은 물론 극한의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 동료에 대한 신뢰, 부상당한 전우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신념 등을 습득하게 된다. 훈련의 강도가 높은 만큼 모든 과정을 이수한 해병 전투부대원은 자부심이 매우 높고, 그래서 美 해병 전투부대는 미군 중에서도 ‘금녀(禁女)의 벽’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그러한 美 해병의 문화는 ‘어퓨굿맨(A Few Good Men·1992년작)’ ‘지아이 제인(G.I. Jane·1997년작)’ 등의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통상 해병대는 상륙작전으로 해안교두보를 확보하고, 증원병력이 전개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부대다. 美 해병대는 약 20만3000명의 현역과 4만 명의 예비군으로 편성돼 있다. 1775년 창설 이래 약 240년 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세계 전사(戰史)에서 가장 화려한 전적을 남기고 있는 군대다. 그중 해병 제1사단은 美 해병대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부대다. 그런데 이 부대가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된 것은 다름 아닌 6·25전쟁 기간에 벌어졌던 ‘장진호 전투(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1950. 11. 27~12. 13)’ 때문이다. 당시 해병 제1사단은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혹한을 극복하고 열 배에 가까운 중공군 9병단(兵端)에 맞서 승리를 거두면서 ‘강인한 군인정신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1950년 10월 26일, 북한의 함경남도 원산에 상륙한 美 해병 제1사단은 美 육군 제7보병사단의 일부와 함께 평안북도 강계에서 워커 장군이 이끄는 美 제8군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험준한 낭림산맥(林山脈)을 넘는 강행군이 100여 ㎞나 지속됐지만 장병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당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서울탈환·평양점령 등 성공적인 반격작전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산에 상륙한 이 부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익숙지 않은 험준한 산악지역과 혹독한 영하의 날씨였다. 설상가상으로 유엔군이 38선을 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던 마오쩌둥(毛澤東)이 대규모 병력을 참전시켰다. 이로 인해 1만2000명의 해병 제1사단은 장진호 지역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 제9병단에 포위당해 자칫 전멸당할지도 모를 위기에 처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엔군사령부로부터 흥남항을 통한 철수작전 명령이 내려졌고, 해병1사단은 피란민들까지 이끌고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까지 가야 했다.

     철수를 위해 장진호 남단의 작은 마을 하갈우리(下碣隅里)를 떠나기 전 해병들은 ‘해병대가(The Marines Hymn)’를 소리 높여 불렀다. “우리는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조국을 위해 싸운다. 정의와 자유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명예를 위해 싸운다.” 그들은 자신들을 막아선 중공군의 치열한 공세에 맞서 “적이 온다. 해병답게 싸우다 죽자!”고 외치며 달려들었고, 새하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과 도로는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결국 중공군은 美 해병의 거센 반격으로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17일간의 사투(死鬪) 끝에 해병 제1사단은 중공군 제9병단 예하 사단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흥남에 도착했고, 이들이 중공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덕분에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유엔군 10만 명과 피란민 10만 명이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 결과 중공군 제9병단은 3만80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해 1951년 3월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못했다. 덕분에 유엔군과 국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이 중공군 제13병단의 기습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던 상황을 감안하면 동부전선에서 거둔 해병 제1사단의 전과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당시 ‘뉴스위크’는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이래 최악의 패배라고 불렀지만, 해병 제1사단에게만은 찬사를 보냈다. 역사학자 에드윈 호이트(Edwin P. Hoyt)는 해병대가 수행한 장진호에서부터의 행군을 “군사(軍史)상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 중 하나”라고 불렀고, 군사전문가 마틴 러스(Martin F. Russ)도 그의 저서 ‘브레이크아웃(Breakout: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Korea 1950)’에서 “장진호 전투는 유엔군의 전략적 패배 속에서 이뤄 낸 전술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훗날 전문가들은 공중 화력지원, 탁월한 전술적 운용 등이 장진호 전투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어떠한 작전적·전술적 분석도 장진호 전투에서 발휘된 美 해병 제1사단 장병들의 투철한 감투(敢鬪)정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당시 전장을 취재하던 영국 종군기자가 후퇴작전의 여부를 묻자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장군(Gen. Oliver P. Smith)은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다!(We a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라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의 답변은 오늘날까지 어떠한 환경의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美 해병대의 강인한 군인정신과 감투정신을 상징하는 격언으로 남아 있다. 우리 장병들이 장진호 전투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기억해야 할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국방부 국방교육정책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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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smc 2017/06/30 13:14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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