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서울 수복 태극기와 박정모 ROKmarine



2018년 9월의 6.25전쟁영웅 박정모 해병대 대령해병의 용사! 서울 수복, 그 감격의 순간 태극기를 휘날리다


News Desk
승인 2018.08.31 19:19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박정모’ 해병대 대령을 9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박정모 대령은 1927년 3월 20일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나 1946년 해군 1기로 입대하였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해병대 소대장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용전분투하였다. 이어 1950년 9월 27일, 서울탈환 작전 시 해병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장으로서 소대원들과 함께 새벽에 공격을 시도하였다.

치열한 교전 끝에 중앙청 안으로 들어가 중앙청 옥상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가장 먼저 게양하는 위업을 달성 하였다.

이후 박정모 대령은 1951년 가리산지구 전투에서 최종 목표인 957고지를 해병대 최초로 은밀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탈취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인 리퍼(ripper)작전에
기여하였다.

도솔산지구 전투에서는 24개 목표 중 적의 최후 방어선인 제9목표를 7일 만에 탈취 확보함으로써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6.25전쟁기간 중 이룬 그의 혁혁한 공에 대해 을지무공, 충무무공 훈장을 수여하였으며, 2010년 5월 6일 향년 85세로 타계하여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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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 논설위원
김도원


입력 : 2010.05.07 23:02


1945년 2월 23일 일본 남쪽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의 수리바치산 정상에 미군 해병대원 6명이 거대한 성조기를 꽂았다. 미군이 6만1000 해병대원을 투입해 요충지 이오지마를 점령한 순간이었다. 미군 6800명, 일본군 2만명이 전사한 혈전 끝에 거둔 값진 승리였다. 해병대원들이 안간힘을 다해 깃발을 꽂는 사진은 곧바로 애국심의 상징이 됐다. 1945년 이오지마전투 기념우표에 이어 1995년 승전 50년 우표에 등장했다.

▶대한민국 국군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승리의 감격을 누린 상징적 순간이 있다. 1950년 9월 27일 오전 6시 10분 서울 탈환에 나선 해병대가 중앙청에서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올렸다. 박정모 소위가 이끈 해병 2대대 6중대 1소대는 새벽 3시 중앙청 공격을 시도해 치열한 교전 끝에 동틀 무렵 중앙청 안으로 들어갔다.






▶"저항하는 적을 사살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대원들 요대(腰帶)를 이은 것을 밧줄 삼아 옥상에 올라가 돌기둥 중앙에 태극기를 동여맸다." 박 소위가 부하들과 함께 태극기를 올린 이튿날 서울은 90일 만에 수복됐다. 그는 계속 최전선에 나섰고 1961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박정모 대령이 그제 84세로 세상을 떴다.

▶1950년 서울에 남았던 사학자 김성칠은 박정모가 싸웠던 9월 27일 시가전 상황을 일기에 적었다. "몇 시간을 두고 탄환이 빗발치듯 하여 방에 있어도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중에 한 알이 사랑방 벽을 뚫고 들어와 잉크병을 깨뜨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더니 내 머리 위를 지나가 무사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박정모와 부하들에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훈"이라며 표창장을 보냈다.

▶국군은 태극기 게양 순간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정부는 1959년 9월 27일 중앙청에서 박정모에게 태극기 게양을 재연시키고 사진에 담았다. 미군의 이오지마 깃발 사진도 현장에서 종군기자가 연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미지에 담긴 역사적 진실과 감격이 퇴색하진 않았다. 박정모가 유엔군에게 서울 수복의 첫발을 뺏기지 않으려고 사선(死線)을 넘어 태극기를 내건 순간엔 결코 굴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혼(魂)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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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07/2010050702595.html

덧글

  • badoc 2018/09/01 10:45 # 답글

  • badoc 2018/09/04 22:12 # 답글

  • 양병수/최국방 2018/09/14 04:59 # 삭제

    서울 수복 직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양병수 해병상사







    묘역번호 : 7묘역 1판 64호 6행 4열

















    1. 생애(1927∼1979)



    1927년 1월 12일 경상북도 포항시 여천동 209번지에서 출생한 양병수(梁丙洙) 일등병조(군번 7200105)는 해병에 입대하여 해병 제1연대 2대대 6중대 1소대 선임하사로 복무하였다.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 및 서울탈환작전에 참여한 그는 1950년 9월 27일 06시 10분 해병 제2대대 6중대 1소대 소대장 박정모 소위와 소대원 김칠용, 최국방과 함께 적탄 및 우군 포화가 작열하는 가운데 수도서울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1952년 2월 8일 미 동성훈장을, 그리고 동년 12월 22일에는 금성충무무공훈장을 각각 수여받았으며, 그 후 제2상륙훈련단에서의 복무를 마지막으로 상사로 전역하였다.



    2. 공적



    양병수(梁丙洙) 해병 상사는 1950년 9월 27일 06시 10분 수도서울탈환작전에 참여해 해병 제2대대 6중대 1소대 소대장 및 소대원과 함께 빗발치는 적탄과 우군의 포화가 작열하는 가운데 수도 서울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 역사적인 대과업을 수행하였다.


    유엔군과 국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 앞에 서울을 더 이상 고수할 수 없음을 자인하게 된 북한군 전선사령관 김책(金策)은 서울을 쉽사리 포기한다면 유엔군의 경춘가도로의 진출을 용이케 하여 낙동강 연선에서 작전중인 북한군의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서울에서 철저한 항전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에 서울방어사령관에 임명된 북한 국방상 최용건(崔鏞健)은 병력 약 2만 명으로 바리게이트를 구축하고 최후발악적인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적의 서울고수를 위한 마지막 시도도 아군의 진격 앞에는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즉 한강을 도하한 해병대는 적의 104고지를 격전 끝에 점령하여 적을 격퇴하고 적으로서는 서울을 방어하는데 있어 최후 외곽방어선이었던 연희고지를 탈환 점령함으로써 수도서울의 완전탈환도 시간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 연희고지에는 적이 104고지에서의 패전을 만회하여 세력을 다시 회복하고자 9월 22일 아침 급거 병력을 끌어 모아 약 16,000명의 2개 혼성여단을 편성하여 이 고지 일대에 경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방어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적의 서울사수계획 앞에서 아군은 인천상륙 이후 승승장구한 전투력을 지나치게 믿었던 까닭으로 첫 번 연희고지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나, 이는 한때의 승리에 만심한 데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엔군과 아 해병대는 9월 22일 서울을 동남에서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적의 외곽방어진을 모조리 돌파하였다. 적은 대부분 의정부-동두천 방면으로 퇴각한 후였으나, 상당한 병력은 여전히 서울 시내에 잠복하여 발악적인 저항을 하고 있었다.


    연희고지를 점령한 미 해병 제5연대 2대대는 수색지구에서 소탕을 완료한 아 해병 제1대대와 합동하여 북아현동 일대로 돌입할 태세를 갖추고 또한 미 해병 제5연대 3대대는 서울-문산가도에서 서대문으로 돌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미 해병 제5연대 1대대는 영등포지구에서 작전중인 미 해병 제1연대와 합류하여 한강을 도하하고 마포에 이르러 아현동으로 진격코자 하였다. 또한 미 해병 제1연대와 합동작전을 수행하게 된 아 해병 제2대대는 24일 18시 향동(香洞)을 출발하여 용강동으로 향하였다.


    유엔군과 한국 해병대는 9월 24일을 기해 서울 돌입태세를 완전히 갖추었다. 이때 통영지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김성은부대가 9월 25일 인천에 상륙하여 26일 13시 수색에 있는 한국 해병대사령부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김성은 대령은 해병대 참모장으로 전임되고 동 부대는 제5대대로 개편되어 참모장 대리였던 김대식 중령이 초대 제5대대장으로 임명과 동시에 즉시 미 해병 제7연대와 합류하여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적의 수중에 있던 수도서울은 9월 24일부터 지상 및 공중폭격으로 인해 폭연에 싸였고, 적은 서울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9월 24일 야간을 기해 각 대는 북아현동, 영천,, 마포를 지향하여 전차를 앞세운 미 해병대와 합류하여 삼엄한 경계하에 놓여있는 서울로 돌입하였다. 즉, 고길훈 소령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 제1대대는 미 해병 제5연대 2대대와 함께 연희고지를 지나 부근 일대의 적을 섬멸하면서 북아현동으로 돌입하였고, 김종기(金鍾淇) 소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는 능곡과 수색 등지에서의 작전을 마치고 미 해병 제1연대와 같이 진격하여 서강을 경유 마포 용강동에 돌입하였다. 당시 미 해병 제1연대는 마포로 한강을 도하하여 부근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2대대는 본부를 마포국민학교에 두고 부근을 수색하면서 청파동으로 향했다.


    한편, 제1대대는 서대문 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여 25일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곧이어 한국 해병대는 한성중학교에 집결하였고, 뒤따라 제5대대도 한성중학교로 전진하였다. 제2대대는 서울역에서 다시 적의 저항에 직면해 분전 끝에 이를 격퇴하고 남대문을 향해 진격하였는데, 이때 첨병으로 제2대대와 교대하여 선두에서 전진하던 미 해병 제2대대는 강력한 적의 바리게이트에 부딪쳐 전진이 정지되자 한국 해병 제2대대와 교대되었다. 75㎜ 직사포 등 중화기사격을 받게 된 제2대대 첨병중대는 고전에 빠졌으나 화염방사기와 전차의 지원으로 적을 모조리 섬멸하였다.


    남대문 일대의 적이 와해되자 제2대대는 민간인들의 신고로 숭어 있는 적을 잡아내어 후송하였으며, 지역의 적색분자를 색출하여 경찰에게 인계하였다. 이 당시 심포학 중위가 지휘하는 제6중대는 소공동 일대에 진출하였으며, 제1소대는 중앙청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였는데, 이들이 서울시청 앞에 진출해서는 그곳에 잠복하고 있던 적을 화염방사기로 한꺼번에 불태워 버리고 시청 지붕 위에 펄럭이던 적기를 찢어버린 후 소지했던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이들은 여기에서 중앙청에도 태극기를 게양하기 위해 대대의 통제를 벗어나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앞까지 전진하였다. 그러나 가도 양편에는 개인 엄호를 구축하고 2-3명씩의 적이 완강히 저항하였고, 광화문 네거리에는 적의 견고한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어서 부득이 본대로 21시경 돌아오게 되었다. 이날 제6중대는 조선호텔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으나, 박 소위의 머리 속에는 중앙청의 태극기 게양문제로 꽉 차 있었다.


    서대문 방면으로 공격한 고길훈 소령의 제1대대는 이날 하루종일 적을 섬멸하고 밤에는 북아현동 구세군 본부 뒷산에서 미 해병 제5연대 3대대와 같이 합동하여 밤을 새우면서 부대를 정비하는 한편 잔적 색출에 주력하였다. 또한 북쪽에서 공격한 제5대대는 미 제7연대와 협동하여 홍제동에서 서울-문산 가도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면서 공격해 338고지 1㎞ 북쪽과 북악산의 1㎞ 북쪽의 산악지대를 모조리 장악하였다.


    이날 저녁까지 한국 해병과 미군은 서울시의 1/3을 확보하는 형세가 되었으나 이는 당초 유엔군 총사령부에서 희망하는 날자보다 약 1주일이나 지연된 것이었다. 그것은 적이 온갖 발악으로 끝까지 서울에서 버티기로 작정하고 아군의 주공방향인 서울 서측방 고지 일대에서 총력을 다한 저항을 시도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우군의 전진은 늦어졌고, 그들 주저항선이 무너진 25일 밤에 있었던 적의 발악적인 역습 역시 더욱 서울탈환의 시일을 늦추게 하였다. 적의 저항력이 거의 와해된 이날은 적이 가두 요소 요소에 설치한 바리게이트 때문에 이를 제거하는데 시간을 끄는 결과가 되었으나 전일에 비해 전진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다.


    박정모(朴正模) 소위는 기도하다 성공하지 못한 중앙청 태극기 게양을 재차 감행할 것을 굳게 마음먹고 자기의 결심을 대대장에게 상신하여 허가를 얻은 뒤 중앙청으로 향했다. 동이 트기 전 박 소위는 소대를 지휘해 03시에 중앙청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면서 세종로를 향했다. 소대장은 태극기를 몸에 감고 2m가 약간 넘는 막대기를 대원에게 갖고 있게 하였다. 소대가 사주를 엄히 경계하면서 조선일보사 앞을 지날 무렵 적으로부터 갑작스런 사격을 받았다. 소대는 곧 이에 대응하여 2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며, 마침내 제1소대가 중앙청 전면에 도달했을 때에는 이미 동이 밝아오고 있었다. 중앙청 정면으로 청내에 돌입한 제1소대는 즉시 청내 수색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먼저 숨어 있는 적을 사살하거나 사로잡을 작전을 전개하면서 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양병수 2등병조와 최국방 견습수병 등 수명을 이끌고 건물 옥상으로 급히 올라갔다. 소대 병력 중 약 3/2를 건물 내에 배치하고 돔에 오르는 사다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들을 갈지자형 쇠다리가 파손되어 있었으므로 로프를 걸어 올라가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소대장은 다시 대원들의 혁대를 모아 이것을 이어 매고 올라갔다. 드디어 돔에 이른 박 소위와 양병수 이등병조 등은 06시 10분 그들이 휴대한 태극기를 12개의 돌기둥 중앙에다 동여매는데 성공함으로써 중앙청은 적의 방화로 화염에 휩싸인 채 90일 만에 다시 태극기를 휘날리게 되었다. 이 공격으로 제1소대의 양병수 2등병조가 미 은성훈장을 받게 되었다.


    한국 해병 제2대대는 동국대학, 동대문, 안암동, 미아리 선까지 진출하고, 제1대대는 북아현동, 서대문, 종로 이상을 담당하였으며, 제5대대는 서울시 외곽 북악산 일대를 담당하여 시가소탕전을 전개하였다.


    9월 27일 저녁을 기해 서울시는 완전 아군의 수중에 들어오고 6월 28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맥아더 사령관, 국회의원, 정부 각 부처 장관이 서울에 입성하여 서울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해병대는 9월 28일 08시부터 중앙청에서 마포까지의 통로연선 경비에 임하였으며, 같은 날 10시 30분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개최된 역사적인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해병대는 수도서울의 경비를 국군 제17연대와 미군에 인계하고 북한강에 진출하여 차단작전을 수행하고 10월 6일 인천에 집결하여 새로운 임무를 띠고 다시 원산상륙작전의 장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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