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臨津江) * 조청미(趙淸美) 역사속으로




재일조선인의 꽃, 프리마돈나 조청미(趙淸美). 북한 예술로 읽다(6)


이철주 편집기획위원
승인 2016.08.17 17:44



1957년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사는 경상도 출신의 탄광 징용자로 총련 상공회 초대회장을 지낸 동포 상공인 조봉대와 진영례의 7남매 중 3녀로 태어나, ‘우리학교’인 규슈(九州)조선중고급학교로 진학해 우리말과 민족예술을 배웠다. 소조 활동시 성악, 피아노, 발레, 피겨스케이팅 등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 온 그녀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 온 것은 16살 때였다.

1973년 7월30일 국립평양만수대예술단이 일본을 최초로 방문했다. 아사히신문 공동주최로, 8월2일부터 동경, 나고야, 오사카, 교토 등 7개 도시를 9월7일까지 순회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와 ‘무용 음악 앙상블’ 공연이 있었다. 이 공연을 무려 5번이나 관람하면서 감동을 넘어 영혼을 관통한 듯한 전율을 느꼈다던 그녀는 무작정 예술단 일행을 따라 시노모세키행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진학과 만수대예술단 입단이라는 꿈을 가졌다. 결국 당시 총련 후쿠오카 상공회 회장인 아버지와 여성연맹 간부였던 어머니를 설득해 평양행을 허락 받았다.

그 시절에 ‘북조선’으로의 귀국은 가히 열풍 수준이었다. 해방 직후 고향으로 귀국시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을 제한한 기만적인 미군정과 일본 정부 때문에 귀국을 미루거나 남았던 이들은 여전한 일제의 차별과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기민정책으로 외면한 한국 정부와 달리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북측이었다. 재일조선인들을 ‘북한 공민’으로 선언하고 일본측에 권리와 인권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1957년 4월8일에는 ‘조선학교’에 첫 교육 원조금과 장학금을 보내주었으며, 이후에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원이 이루어졌다. 동포 사회는 이것을 ‘생명수’라 부르며 환호했고, 이것이 현재의 북과 재일동포 사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초가 되었다.


▲ 혁명가극 ‘피바다’ 중에서[사진출처 : 유튜브 켑처]

195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재일조선인의 귀국을 수용한다는 외무성 성명을 발표했고, 1959년 8월 조일적십자 간의 인도 ‘캘커타(Kolkata)협정’ 조인으로 귀국의 길이 열렸다. 1959년 12월14일 재일동포 975명이 최초로 만경봉호를 타고 나가타항(新潟港)에서 청진항으로 귀국을 하였다. 조청미는 1973년 7월 제169차 귀국선에 올랐다.

 

*1959년 12월 14일, 재일동포 234세대 975명을 실은 소련 선박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일본의 나가타 항을 출항해 청진항으로 향했다.


[출처] 재일동포 첫 북송|작성자 보노보노



평양에 간 그녀는 대동강변에 자리 잡은 총련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지내며, 평양음악무용대학 예비과를 거쳐 같은 해 10월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하였다. 2번의 변성기와 소아결핵으로 난관도 많았지만, 이화여대 출신의 월북 성악가인 조경, 강시종, 왕혜숙 교수 등의 지도를 받으며 착실하게 성악가의 길을 밟을 수 있었다.

1979년 최우등으로 졸업을 한 조청미가 1980년 처음 배속된 곳은 ‘피바다가극단’이었다. 평양음악무용대학 연구원(대학원) 수재학부를 병행하며 실력을 쌓아가던 그녀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1987년 10월이다. 당에서 심사 끝에 프랑스 툴루즈국제성악콩쿨(Toulouse International singing competition) 참가를 허락한 것이다. 제33차 콩쿨의 요강은 칸타타, 오페라 아리아, 프랑스 노래 등을 겨누는 것으로, 26개국에서 105명이 참가를 했다. 2차 심사 직전 감기 몸살에 걸려 위기가 찾아 왔지만, 3차 결선 결과 소련과 캐나다 참가자에 이어 3위로 입상을 했고, 동시에 특별상까지 수상을 하였다.

국내에서의 입지는 이미 탄탄대로였다. 1983년 3월부터 혁명가극 ‘피바다’에서 주인공인 을남 어머니 역에 캐스팅되어 ‘피바다’의 2대 어머니로 활동 중이었다. 1971년 7월17일 초연한 날부터 ‘피바다’의 1대 어머니 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북측 최고의 성악가 중 한명인 김기원으로부터 바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 혁명가극 ‘피바다’ 중에서 [사진출처 : 유튜브 켑처]

북측은 1960년대 악기 개량과 더불어 민족가극을 만들어 내었고, 1970년대 이르러 ‘피바다식’ 혁명가극을 선보였다. 북측 5대 혁명가극인 ‘피바다’, ‘꽃파는 처녀’, ‘당의 참된 딸’,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 중 완성도가 가장 높다는 ‘피바다’는 1970년대 진행된 문예혁명의 시작이자 전범이 된 작품이다. 피바다가극단은 ‘속도전'을 통해 1년 만에 ’피바다‘를 창작함으로써 혁명문예 발전에 공헌한 단체로 평가를 받아, 주체 60년(1971년) 7월17일을 창립절로 기념하고 있다.

혁명가극 ‘피바다’는 항일무장투쟁 시절인 1936년 8월 만주 만강부락에서 처음 공연한 김일성 주석의 창작 연극 대본 혈해(血海)를 각색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노래를 ‘절가’화 하고 ‘방창’을 도입하였으며, 민족악기에 서양악기를 배합한 주체적 ‘배합관현악’ 편성을 받아들이고 무대미술의 새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주제와 방식의 혁명가극의 전형을 선보였다.

이 혁명적인 전통은 오늘에도 이어져, 피바다가극단은 2016년 4월23일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는 혁명가극을 초연한 바 있다. 북측이 청년 세대의 새로운 '혁명의 교과서'로 내세우고 있는 이 작품은 항일운동가인 최희숙의 이야기를 통해 김정은 시대의 혁명 신념을 주창하고 있다.


▲ 가극 '꽃파는 처녀' 중에서 [사진출처 : 유튜브 켑처]

‘피바다’는 ‘꽃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과 함께 김일성 주석이 직접 창작하였다는 3대 ‘불후의 고전적 명작’으로서, 1960년대부터 다양한 예술장르로 창작되었다. 1969년에는 백두산창작단에서 예술영화 ‘피바다’(최익규 연출)가, 1973년에는 장편소설 ‘피바다’(국내에서는 ‘민중의 바다’로 발간)와 교향곡 ‘피바다’(김영규 작곡)가 발표되었다.

‘피바다’는 1930년대 해방투쟁 시기에 평범한 한 어머니가 일제와 지주의 학정과 착취 속에서 혁명을 인식하고 투쟁으로 나선다는 내용으로, 남편을 잃고 유랑하면서 자식들의 유격대 활동과 자신의 의식화를 통해 혁명에 대한 헌신과 강고한 의지, 교양적 풍모를 발휘하는 공산주의 혁명가의 어머니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북측은 주장한다. 이렇게 혁명 문예의 전형적인 인물로 묘사가 되는 ‘피바다’ 혁명가극의 어머니가 바로 ‘피바다’ 가극의 주제적 인물이기 때문에 해당 역할을 맡는 배우는 당대 최고의 프리마돈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87년 12월 공훈배우 칭호, 1997년 11월 인민배우 칭호를 수여받은 조청미는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각별한 관심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1990년 6월21일 보천보전자악단 예술인 독창회 공연을 참관한 김정일 위원장은 조청미를 눈여겨보아, 1990년 12월3일에 독창회를 열게 했다. 조청미 독창회에 참석한 김정일 위원장은 “녀성독창과 무용 ‘빛나라 정일봉’에서 녀성독창을 한 가수가 노래를 잘하였습니다. 노래 ‘빛나라 정일봉’을 중음으로 색깔 있게 잘 형상하였습니다”고 칭찬하였다. 이후 1991년 6월 두 번째 독창회, 1993년 10월 세 번째 독창회까지 개최하게 되어 북한 음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 가극 '꽃파는 처녀' 중에서 [사진출처 : 유튜브 켑처]

조청미는 영화배우 오미란과 함께 ‘공연성과 축하편지’라고 하는 팬레터를 가장 많이 받는 예술인으로 부러움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17년만의 도일 무대였을 것이다.

1990년 9월14일 국립평양예술단의 단원으로 조청미는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십수 년 전 동경하던 평양 예술가들을 따라다녔던 철없던 소녀가 이제는 북측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되어 고향집을 찾은 것이다. 비록 한반도를 닮은 정원을 집에 둘 정도로 통일을 열망하던 아버지는 그 사이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피바다 주역을 맡은 첫 공연에도, 국제콩쿨의 현장에도 함께해 준 어머니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후쿠오카의 자랑’이라는 현수막이 거리에 내걸렸고, 그녀는 ‘재일조선인의 꽃’이 되었다.

1991년부터 윤이상연구소의 겸임가수로도 활동을 한 바 있는 조청미는 윤이상 선생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산다고 한다. “예술가는 정치에 등 돌리지 말고 정치에 밝아야 하며, 예술가는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합니다.”

조청미 임진강 https://www.youtube.com/watch?v=mtkSXWnJiMc

조선국립교향악단 교향곡 피바다 https://www.youtube.com/watch?v=fL8iyTyURbE

* ‘피바다’ 등 혁명가극의 영상과 음악은 유튜브에서 다양하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철주 편집기획위원은 10년 넘게 남북 사회문화교류 영역에서 활동해 온 문화기획자다. 금강산가극단 내한공연 제작, 평양조선국립미술관 내한전 합의, 사할린 남북 해외 청소년 평화미술전 주관, 조선무용50년-북녘의 명무, 철원노동당사 DMZ평화음악회, 조선학교 중등교육 70주년 기념 꽃송이콘서트 등을 제작했다. 현재는 남북합동음악회와 평화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991  원본기사



 

  


 

 임진강  조청미  MV


 

적우 임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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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강 2018/10/08 01:23 # 삭제 답글


    HOME 기획연재 이철주 북한(조선)예술 '임진강' 작곡가 고종환북한, 예술로 읽다 (1)
    이철주 편집기획위원승인 2016.05.04 11:00댓글 1글씨키우기글씨줄이기메일보내기인쇄하기페이스북트위터구글카카오스토리
    통일로 가는 길엔 동질성 회복과 정서 공유가 함께해야 한다. 음악과 예술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대표적인 매개체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대를 키워줄 것이다. ‘북한, 예술로 읽다’에서는 오랫동안 남북문화교류사업 현장에서 습득한 정보와 경험을 토대로 북의 음악과 예술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을 만날 수 있다. [편집자]
    남과 북 그리고 해외가 함께 부르는 대표적인 망향가가 ‘임진강’이다. 고종환 작곡, 박세영 작사의 임진강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월북 시인인 박세영이 가사를 쓰고 성악가 출신 고종환이 곡을 쓴 임진강은 일본에서 먼저 인기를 끌었다. 60년대 포크가수로 유명했던 ‘더 포크 크루세이더주(The folk Crusaders)’가 1968년 리메이크해 인기를 모은 것. 그러나 당시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활동과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거 등 일본 학생운동으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와 국제적인 냉전관계에 따라 금지곡으로 묶였다가, 마츠야마 다케시의 소설 ‘소년 M의 임진강’을 원작으로 해 2004년 제작된 일본 영화 ‘박치기’에 OST로 사용되면서 일본과 한국에서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되었다.

    북한 출신의 작곡가로 잘못 알려져

    2006년 KBS 드라마 ‘서울 1945’에서 가수 적우가 부른 임진강이 삽입이 되었고, 2007년 ‘박치기’ 후속작인 ‘박치기, Love&Peace’에서는 팝페라 가수 임형주도 불렀다. 또 2013년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도 삽입곡으로 사용되는 등 북측 노래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곡이 창작될 당시 북측의 경제력이 남측보다 나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협동벌 이삭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라는 2절 가사가 체제 선전용이라는 부담 때문에 1절만 반복해 부르거나 2절을 일부 바꾸어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인터넷에서는 재일조선인 출신으로 북측 최고의 성악가로 자리 잡은 조청미가 부른 노래가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의 작곡가인 고종환(高鐘煥)에 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심지어 북한 출신의 작곡가로 잘못 알려져 있기까지 하다. 아명이 고해룡(高海龍)인 그는 1930년 9월5일 서울 종로구 연근동에서 태어났다. 한국 최초의 테너가수이자 이화여대 교가의 작곡자이며, 월북해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낸 바 있는 안기영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경성음악전문학교에서 성악 강사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의용군에 입대한 후에 월북하였다.

    북에서는 조선인민군협주단 합창단과 교통성협주단에서 활동하였다.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취학하는 재직반을 신청해 평양음악대학 작곡학부를 졸업, 이듬해인 1965년부터 조선음악가동맹 작곡가로 활동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모든 작곡가들이 현재와 같이 각 예술단 소속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가동맹에 소속되어 각 예술단에서 의뢰가 들어오면 창작을 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임진강은 1957년 7월, 고종환이 27살 때 작곡하였다. 당시 55살로 북의 애국가를 작사할 만큼 유명한 시인 박세영과 같은 출신지인 서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북 분단의 아픔을 담은 가사를 써달라고 제안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누구보다 통일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박세영은 흔쾌히 그의 제안을 수락했고, 추후 선율을 받고서 가사를 달았다고 한다. 노래는 1958년 9월 공훈배우이자 소프라노 가수인 유은경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 해 ‘공화국 창건 10돌’ 기념공연을 통해 공식 발표되었지만, 전문가들의 호평과는 달리 ‘천리마운동’을 하던 사회 분위기로 인해 인민들에게는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임진강 - 출처 경기도청 홈페이지
    일본서 사랑받은 이유는 대다수 재일동포 고향이 남쪽

    이 노래가 일본에서 많이 애창된 이유는 절대 다수 재일 동포들의 고향이 남측에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에서 1960년 발간한 ‘새노래’ 3집에 게재되면서, 총련 조직 산하의 각 단체들과 기관, 교육조직인 성인학교, 청년학교 그리고 초중고급학교와 조선대학에 이 노래가 보급된 것이 주효했다.

    한편 이 노래를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소년 M의 임진강’이란 소설을 쓴 임진강의 일본어 가사 작사자인 마츠야마 타케시(松山猛)였다. 1968년 중학생 시절을 보낸 그는 쿄토(京都)에 있는 조선중고급학교를 찾았다가 이 학교 학생들이 합창하는 ‘임진강’을 우연히 듣게 된다. 취주악부에서 트럼펫을 불던 마츠야마는 개인 연습장이었던 쿠죠오하시(九條大橋)에서 색소폰을 불던 같은 또래의 재일 조선인 소년을 알게 되었고, 그 소년에게서 이 곡의 멜로디와 1절 가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 친분이 있던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즈에게 이 곡을 소개해주었다.

    저작권자를 밝히고 정확한 가사로 번역하며, 북조선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명기해 달라는 총련의 요구와 북한 노래가 유행하는 것을 탐탁찮게 여긴 일본과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토시바(東芝) 레코드사에 의해 추진되던 음반 발매는 중단되었다. 그렇지만 ‘재일 아리랑’이라고까지 불리는 ‘임진강’은 재일동포 사회와 일본에서 꾸준히 불려왔다. 재일 소프라노 전월선, 재일 한국인 가수 박영일(아라이 에이이치, 新井英一)과 박보(朴保), 일본 최고의 민요가수인 RIKKI, 쿠와타 케이스케(桑田佳祐), 호소츠보 모토요시(細坪基佳), 김연자 등등.

    작곡가인 고종환은 이후에도 수많은 가극 창작에 참가했고, 다수의 가곡과 아동 가요를 발표하였다. 말년에는 평양학생소년궁전의 작곡가로 활동을 이어갔다. 2001년 가수 김연자의 평양 공연 때 고종환과 면담이 예정되었으나, 갑작스럽게 함흥 시찰을 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행하게 되어 면담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2002년 3월25일 71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앞으로도 이 노래가 우리 민족의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달래주고 남북통일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해 준다면 나로서는 여한이 없다”는 말을 끝으로 남겼다고 한다.

    조청미 임진강 https://www.youtube.com/watch?v=uz6mZ-A_xTg

    영화 ‘은밀하고 위대하게’ 중 임진강 https://www.youtube.com/watch?v=BeagWFxrL1k

    적우 임진강 https://www.youtube.com/watch?v=NIXQF7fNplw


    * 이철주 님은 10년 넘게 남북 사회문화교류 영역에서 활동해 온 문화기획자다. 금강산가극단 내한공연 제작, 평양조선국립미술관 내한전 합의, 사할린 남북 해외 청소년 평화미술전 주관, 조선무용50년-북녘의 명무, 철원노동당사 DMZ평화음악회, 조선학교 중등교육 70주년 기념 꽃송이콘서트 등을 제작했다. 현재는 남북합동음악회와 평화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철주 편집기획위원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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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강 2018/10/08 10:24 # 삭제 답글

    임진강-조청미|북한가요

    림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고향 남쪽땅 보고파도 못가니
    림진강 흐름아 원한싣고 흐르냐


    강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마다 물결우에 춤추니
    림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내고향 남쪽땅 보고파도 못가니
    림진강 흐름은 원한싣고 흐르느냐
    림진강 흐름은 원한싣고 흐르느냐


    개작된 가사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임진강 하늘 높이 무지개 서는 날
    옛 친구 들판에서 내 이름 부를 때
    내 마음 고향모습 추억속에 사라져도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내고향 북녁땅 가고파도 못가니
    림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림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조청미


    현재 북한의 혁명가극 '피바다' 의 주인공 을남 어머니역을 열연하고 있는 인민배우이자 북조선의 프리마돈나 '총련의 딸'조청미(47)는 북한에서 팬 레터를 많이 받는 배우로 알려져 있다.


    1957년 일본 후쿠오카(福岡)현에서 태어난 총련 출신이다.


    총련계 조선중고급중학교를 마친 그는 1973년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유학했다. 이 대학을 졸업한 후 1980년 북한 피바다가극단에 입단, 성악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83년 3월부터 혁명가극 피바다에서 어머니역을 맡았던 그는 1987년 10월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성악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7년 12월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평양에서 수차례 개인음악회를 갖기도 했다.


    1989년 3월 독창 '빛나라 정일봉'을 불러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로부터 중음(中音)을 잘 표현했다는 찬사를 들었으며, 1997년 11월에는 배우로서는 최고 영예인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조청미가 부른 노래로는 가요 '산으로 바다로 가자', '우리의 청춘시절', 영화음악 '마음의 깃을 찾아'(영화 <내가 본 나라> 주제가), '조국의 품에 안겨' 등이 있다.















  • 임진강 2018/10/08 10:33 # 삭제 답글

    朴世永

    1902년 7월 7일 ~ 1989년 2월 28일, 86세

    경기도 고양군 출신 월북 시인.

    송영과 함께 배재고보에 입학하여 교원 강매, 이중화의 영향을 받아 문학을 하기 시작했다. 3.1 운동 당시 송영과 함께 등사신문을 발간해 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배재고보 졸업 후 상하이로 갔다. 문학단체 염군사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황포강반>을 발표했고 귀국후에는 1925년 연희전문에 편입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카프 문학운동에 참가했으며, 송영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동시를 다수 창작하였다. 1928년에는 고향 고양군에서 교원을 역임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동시, 동극을 발표하였다. 1937년 시집 《산제비》를 펴낸 이후 해방까지 절필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월북하여 조선문학작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출판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인 애국가를 작사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종군작가로 참전하여 군무자들의 문예 활동과 창작을 지도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요직을 두루 겸하였고, 1955년에는 몽골 방문 경험을 토대로 <몽고방문시초>를 썼다. 1962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서사시집 <<밀림의 역사>>를 썼는데, 북한에서 이 작품은 조기천의 <<백두산>>과 함께 북한의 2대 걸작 서사시로 평가받았다.

    그가 지은〈림진강〉은 1950년대에 지은 유행가로, 대한민국에 두고온 가족들과 벗들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노래인데 가사 내용 중에 남한의 궁핍한 경제상을 북한의 풍족한 협동벌의 모습과 대조시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담으려 했다. 이 노래가 남한에서 유행하자, 정부는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탄압하였지만 1990년대에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재일교포 가수 김연자가 서울에서 진행된 텔레비전 음악회에서〈림진강〉을 노래하여 남한에서도 림진강을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양희은, 김용우, 적우 등이 리메이크하여 불렀으며, 북조선에서는 재일교포 출신의 성악가 조청미가 불렀다. 이 노래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널리 불렸는데, 2005년 조총련을 주제로 한 일본 영화 박치기의 주제가로 남한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59년 공훈작가 칭호 국가훈장 2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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