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병대 vs 대한민국 해병대 ROKma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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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대한민국 해병대의 어제와 오늘


김태우·동국대 석좌교수
2017-04-26


한반도의 안보격랑 속에서도 대한민국 해병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평양정권이 제6차 핵실험을 준비하고 대륙간탄도탄을 시험 발사하겠다고 하자 미국이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고 경고를 발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지난 4월 6~7일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가진 이후 중국은 북한이 한번 더 핵실험을 하면 원유공급을 줄이겠다고 경고하고 있으며, 평양의 주유소에는 차량들이 길게 줄을 서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중에도 평양정권은 4월 15일 태양절 열병식을 통해 신무기들을 선보이면서 무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반도에는 엄청난 안보격랑이 몰려올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도 조국강산을 지키는 대한민국 해병의 용(龍)들은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해룡부대로 불리는 동쪽의 해병 1사단, 청룡부대로 불리는 서쪽의 해병 2사단, 백령도를 지키는 흑룡부대 6여단, 공룡부대로 불리는 연평부대, 제주도를 지키는 9여단, 교육훈련단, 군수단 등 모든 해병부대들은 오늘도 ‘충성·명예·도전’이라는 해병의 3대 가치를 되새기면서 누구든 우리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오늘도 훈련, 경계 그리고 작전에 임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북한군이 평양에서 대규모 군사퍼레이드를 벌이던 지난 4월 15일은 한국 해병대가 창설된 지 68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한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진해에 있는 해군 덕산비행장에서 380명이라는 조촐한 규모로 창설되어 초대 신현준 사령관이 취임했습니다.

해병대는 창설된 지 불과 1년 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하는 선봉대로 활약했습니다. 1950년 7월말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의 서부지역을 돌파하기 위해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 김성은 부대는 통영상륙작전을 벌려 북한군을 소탕했고, 9월에는 경인지구 작전에 투입되어 9월 28일 서울 수복의 선봉에 섰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세가 악화된 1951년 여름에는 도솔산지구 작전과 김일성·모택동고지 작전을 벌여 강원도 양구 지역의 전략요충지들을 탈환했습니다. 1952년 3월부터는 중동부 장단·사천강 전투에 투입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될 때까지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운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중부전선을 지켜냈습니다.

해병은 월남에서도 숱한 신화를 남겼습니다. 1967년 2월 짜빈동 전투는 ‘귀신잡는 해병’의 명성을 다시 한번 드높인 계기였습니다. 2월 14일 밤 월맹군이 추라이 지역의 비행장과 포병진지를 장악하기 위해 2개 연대를 투입하여 그 길목인 짜빈동 지역을 공격했을 때, 그곳을 지키는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는 혈투 끝에 열 배에 달하는 적군을 물리치고 고지를 사수했습니다. 이 전투로 11중대는 중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이라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시대의 변천과 함께 한국 해병대도 조직과 편제를 달리해왔습니다. 1973년 월남 파병이 종료되면서 해병사령부는 해군에 통폐합되었지만 상륙작전에 대한 지휘구조 개선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1987년에 재창설되었습니다. 2008년에는 한미 연합해병구성군사령부(CMCC)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연합 훈련시와 전시에 상륙기동부대로서의 한미 해병대의 연합태세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011년 6월 15일에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가 창설되었고 7월에는 해병대의 독자적 지휘권을 강화하는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서방사는 한국군 최초의 합동군사령부로서 해병사령관이 사령관을 겸임하면서 육해공군으로구성된 합동참모단을 거느리고 북한 도발시 입체적인 대응을 하는 체제를 갖춘 부대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을 겪으면서 도발시 즉각적 대응·응징이 가능하도록 현지 지휘관에게 재량권을 위임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과 국민적 요구에 따른 것입니다. 또한 2015년 12월 1일에는 기존의 제주방어사령부를 확대 개편하여 해병 제 9여단을 창설했는데, 이는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건설됨에 따라 제주도와 부속 도서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 해병대는 세계에서 가장 훈련을 많이 하는 부대이기도 합니다. 해병대는 금년에 들어서도 정규 연합훈련인 키리졸브-독수리 훈련 이외에도 이미 많은 훈련들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해병 제1사단은 미 해병대와 함께 연합 공병훈련과 연합 포병훈련을 벌였고, 2사단은 2월 동안 연합 전술훈련을 통해 한미간 팀워크와 상호운용성을 점검했으며, 3월에는 연합 고공강하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이와 함께 제1사단은 1월에 혹한 속에서 초급간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박3일 전장극복훈련을 실시했고, 서해 최전방 우도에서는 북한 도발에 대비하여 민간인 응급환자들을 현장 처치하는 훈련도 실시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북한의 화생무기 사용에 대비한 대량전상자 처리절차 훈련도 실시했으며, 3월에는 해병 연평부대가 주관한 민·관·군 통합 도서방어종합훈련이 있었습니다.

북한이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한 한국 해병은 유사시 즉각 반격상륙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적의 심장부를 향해 돌진하는 비수가 될 것입니다. 최근 북한은 미국이 자신들의 미사일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는 것과 관련하여 미국이 자신들에게 군사행동을 하면 한국을 향해 보복할 것이라면서 가만히 있는 한국을 걸고 넘어지는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만, 한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전쟁을 도발할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의 최우선 관심사는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전쟁을 예방하여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지키고 것뿐입니다. 하지만, 북한이 도발하면 강력한 응징에 나설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 한국 해병대는 어제도 오늘도 훈련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덧글

  • badoc 2018/10/25 05:26 # 답글

    [Why] 백령도·연평도·포항·김포… 해병대는 왜 그 곳에 있을까

    조선일보 박국희 기자

    입력 2009.06.13 03:09 | 수정 2009.06.15 17:33


    "나는 국가전략 기동부대의 일원으로서 선봉군임을 자랑한다." 해병대원이라면 누구나 외우는 '해병의 긍지' 첫 마디다. 1949년 4월 15일 380명으로 창설된 해병대는 현재 2만6000여명 규모다. 소수 정예지만 해병대 2개 사단을 막기 위해 북한군 8개 사단이 동·서해안에 배치돼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최근 북한의 군사적 도발 위협 속에 연평도와 백령도의 해병 부대가 주목을 받았다. 연평도(연평부대), 백령도(6여단)를 비롯 포항(1사단), 김포(2사단)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가 그곳에 자리잡은 이유는 뭘까?

    ◆백령도·연평도

    북위 37도 52분에 위치한 백령도는 서해 최북단의 섬이다. 해병대는 한국전쟁 당시 치러졌던 '전략도서 확보 작전(1951~1953)'을 통해 서해 5도를 점령했다.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다. 서해뿐이 아니었다. 해병대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1951년 함경남도 원산 앞바다 여도에 상륙했다. 영흥만 일대 신도 등 7개 도서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함경북도 명천 부근의 양도와 평안남도의 석도, 초도에도 상륙했다.

    해병대 1사단 장병들이 경북 포항시 도구 해안에서 IBS(상륙용 소형고무보트)를 머리에 지고 이동하는 ‘헤드 케리어’훈련을 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53년 휴전협정이 됐다. 북한과 중공군은 38도선을 경계로 각자의 영토를 원상복귀 시키자고 했고 한국과 연합군은 현재의 실 점령지를 기준으로 주장했다. 결국 '전략상의 이유'로 해병대가 북한 쪽 영해 깊숙이 위치한 여도와 양도 등에서 철수하면서 현재의 서해 5개 도서만 아군 통제 하에 두게 됐다. 해병대가 백령도에 연평도에 주둔하는 이유다.

    ◆김포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탈환한 해병대는 북진했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 고성과 원산, 함흥까지 진격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를 하게 된다. 해병대는 부산과 진해로 후퇴했다. 그해 2월 한미 연합군의 서울 재수복작전이 재개됐다.

    현재의 김포, 강화에 해병 2사단이 주둔하게 된 것은 그때 서울 재수복 작전에 기인한 면이 크다. 1951년 3월부터 '김포지구 작전'을 통해 김포 반도를 완전하게 장악한 해병대는 1953년 휴전 시까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의 수도 서울 침공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현재 김포 2사단을 비롯하여 백령도 6여단과 연평부대는 일반적인 사단의 규모에는 못 미친다. 공격 부대라기보다는 서해 최북단의 진지 방어를 주 임무로 하고 있다.

    ◆포항

    1951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 서울을 지킬 수 있도록 '가장 강한 부대'인 한미 해병대를 장단(사천강)지구로 배치해 달라"고 벤 플리트 당시 미8군 사령관에게 요구했다. 당시 강원도 양구군 도솔산 지구에 있던 해병 본진 1개 연대가 1952년 3월 파주 장단지구로 옮겨졌다. 이듬해 휴전이 되면서 해병대는 1959년까지 파주 지역에 머무르게 된다.

    1959년 3월 12일 일부 부대가 상륙작전 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키 위해 파주 금촌에서 포항으로 이동했다. 3월 30일 대통령령 제1468호에 따라 제1상륙사단으로 정식 승인을 얻어 국내 유일의 국가전략기동부대가 됐다.

    포항으로 내려가게 된 이유는 당시 포항에 주둔하던 미 해병대 제3항공단이 1959년 본국으로 철수했기 때문이다. 애초 미 5전술공군이 들어오려 했으나 '항만이 발달하고 철도와 비행장이 있는 넓은 지역'이라는 특성을 들어 상륙부대인 한국 해병대가 자리잡게 됐다.

    해병대전략연구소의 김현기(64) 예비역 대령은 "당시 해병대는 지원도 많지 않고 독자적으로 보유한 땅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포항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며 "전략적인 위치와 판단 때문에 반드시 포항에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박경업(50) 해병대 기념관장은 "육군과는 달리 안정 지역에서 적의 측·후방 깊숙이 침투하는 상륙부대의 특성상 주둔 위치에 크게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 인천상륙작전을 했던 미 해병 1사단 본대는 캘리포니아 본토에서, 미 육군 7사단은 일본에서 출발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12/2009061201319.html

    http://rokmc-class.co.kr/22 해병대의 역사
  • 해병대찬가 2019/06/26 15:03 # 삭제 답글

    이 노래의 가락은 자크 오펜바흐의 1859년 오페라 '주느비에브 드 브라방(Geneviève de Brabant)' 중 국가 헌병(Gendarme)의 듀엣(Gendarmes' Duet)에서 따 왔으며, 작사자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가사 내용으로 보아 19세기 중반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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