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군관학교(満州国陸軍軍官学校) 졸업생 역사속으로



[봉천군관학교]

•4기 – 5명

◦김응조: 만주군사병 출신. 훗날 대한민국 국군 육군 준장을 지냈다.
◦계인주: 만주군사병 출신. 헌병병과. HID 대장으로 켈로(KLO) 부대 통솔
◦강재호: 간도특설대
◦박봉조: 간도특설대
◦이원형: 간도특설대

•5기 – 18명 합격(1명 퇴교, 1명 소속변경). 응모 자격에 조선계 명시. 간도특설대 창설 멤버.
◦정일권: 일본육사 55기 편입. 한국군 육군 대장, 국무총리.
◦김일환: 한국군 육군 중장, 교통부장관.
◦김백일: 간도특설대. 본명 김찬규. 한국군 육군 중장.
◦김석범: 간도특설대. 일본육사 54기 편입. 한국군 해병 중장.[5]
◦송석하: 간도특설대. 수석졸업. 한국군 육군 소장.
◦신현준: 간도특설대. 본명 신봉균. 한국군 해병 중장.[6]
◦최경만: 간도특설대
◦김홍준: 간도특설대
◦윤춘근: 간도특설대
◦문리정: 간도특설대
◦석희봉: 간도특설대. 일본육사 54기 편입
◦전해창: 졸업 직전 독립운동 세력으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아 입교했다는 혐의로 퇴교



•6기 - 2명

◦양국진: 한국군 육군 중장.
◦김용기: 간도특설대
◦조○○: 간도특설대. 창씨개명 도요타. 일본계로 계산 된 듯.



•7기 - 7명

◦박승환: 우등졸업. 만주군 항공장교, 조선인민군 창군멤버.[7]
◦최남근: 간도특설대. 한국군 육군 중령.[8]
◦최재환: 간도특설대



•8기 - 3명

◦석주암: 한국군 육군 소장.
◦태용범: 간도특설대 1기 사병 출신



•9기 - 3명

◦백선엽: 간도특설대. 수석졸업. 한국군 육군 대장, 교통부장관.
◦윤수현: 간도특설대 1기 사병 출신
◦손병일: 간도특설대 1기 사병 출신



[육군훈련학교]


봉천군관학교가 신경군관학교의 출범으로 역할과 위상이 애매해지자, 1940년 12월 체제를 개편해 새 출발하게 되었다. 하사관 중에서 소위 후보자를 골라 단기 교육을 하여 초급장교를 양성했다.

•2기 – 1명
•4기 – 2명
•5기 – 3명
•6기 – 3명


•7기 – 13명 전원 간도특설대 출신

◦이용(이집룡 육군 소장, 강원지사), 김충남, 최재범, 박춘식, 최병혁, 김용호, 이용성, 이동준, 이봉춘, 방태욱, 이덕진, 구동욱





[신경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체제를 모방해 1939년 3월에 설립된 4년제 장교 양성 학교다. 신경 남방 교외 7킬로미터 지린 가도에 연한 라라툰 난강 대지에 세워졌고, 교사는 동덕대(同德臺, 퉁더타이)로 불렸다. 정식 명칭은 만주국 신징 육군 군관학교 였다. 현재는 장갑병기술학원이 들어섰다.



•1기 – 13명. 정일권의 모교인 용정 광명중학교 출신 11명.[12]

◦박임항: 수석졸업. 한국군 육군 중장, 건설부장관.
◦이주일: 한국군 육군 대장, 감사원장.
◦최창언: 우등졸업. 한국군 육군 중장, 국방대학원장.
◦김동하: 한국군 해병 중장.[13]
◦방원철: 조선인민군 중앙경비대 대대장, 한국군 육군 대령.[14]
◦김영태
◦윤태일: 한국군 육군 중장, 서울특별시장. 국회의원.
◦이기건: 조선인민군 1사단 참모장, 한국군 육군 준장. [15]
◦최창륜: 만주군 항공장교, 조선인민군 보병공급부장.[16]



•2기 – 11명

◦박정희: 수석졸업. 한국군 육군 대장, 대한민국 제 5대~9대 대통령
◦이한림: 한국군 육군 중장.[17]
◦이재기: 간도특설대. 본명 이정린
◦김묵: 간도특설대. 본명 김명철



•3기 – 2명

◦최주종: 한국군 육군 소장.



•4기 – 2명

◦장은산: 수석졸업



•5기 – 5명. 이때부터 조선인이 만계에서 일본계로 간주됨. 전원 일본 육사 본과 편입.

◦강문봉: 수석졸업. 한국군 육군 중장, 국회의원



•6기 – 9명. 1945년 7월 일본육사에 편입하기 위해 도쿄로 보내졌지만, 딱 한 달 뒤 일본제국은 멸망했다.

◦김동훈: 해방 후 서울대 금속공학과 졸업.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김윤근: 한국군 해병 중장.
◦김학림: 여순사건 후 숙군 시 박정희와 함께 무기징역을 언도받음.
◦육굉수: 해방 후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인하대 공과대학 교수.



•7기 – 4명

◦김광식: 해방 후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한양대 공과대학 교수.









満洲国軍の教育機関は1932年(大同元年)に設立された2年制の中央陸軍訓練処(のち奉天軍官学校に改称、1942年(康徳8年)に陸軍訓練学校へ改編)に端を発する。中央陸軍訓練処は、在来(軍閥)の軍隊を主体として設立した満洲国軍を真の国軍とするため、国軍幹部養成の綜合的教育機関として設立された。

本校は1939年(康徳6年)4月に、満洲国軍の正規課程に基づく軍官(士官)を育成する機関(士官学校)として、陸軍軍官学校令(康徳6年3月10日勅令第50號)に基づき、新京特別市郊外、二道河子より東方約8粁、吉林街道沿いの拉々屯台地(南崗台地)に設立された。日本人将校を育成するだけの学校ではなく、台湾人、朝鮮人、満洲人が同じ教育・訓練を受けた士官学校である[注釈 1]。なお、蒙古系満洲人に対しては、1934年(康徳元年)7月に蒙古人軍官養成を専門とする興安軍官学校が設立され、1939年(康徳6年)10月に陸軍興安学校に改称した。成績優秀者には満洲国皇帝の愛新覚羅溥儀から恩賜の金時計が与えられた。1941年(康徳8年)からは皇弟の愛新覚羅溥傑も教官を務めていた。

満洲国及び満洲国軍の解散後、跡地は国民政府に接収され、国共内戦後は中国人民解放軍戦車第三編練基地となる。現在同地には中国人民解放軍装甲兵技術学院(中国語版)が立つ。





第二次世界大戦後、満系生徒たる朝鮮人出身者の多くは軍事英語学校を経て南朝鮮国防警備隊、そして大韓民国国軍に入った。彼らは出身校や軍官学校で培った横の繋がりが非常に強く、その結果、同期で南朝鮮労働党に感化されて麗水・順天事件の折に粛軍運動の犠牲となった者も少なくなかったが、粛軍を免れた者は日本陸士・幹候出身者同様に軍内部で出世する事が出来、また5・16軍事クーデターでの強力な支持基盤ともなった。

一方で、朝鮮建国準備委員会の指示でソ連占領地域に越北した南朝鮮国防警備隊将校の多くが満洲国軍出身者だった。当初正規の軍事訓練を受けた事で八路軍や東北抗日聯軍出身者からは歓迎されていたが、翌年になると旧満洲国軍出身者のほとんどが投獄されたという。唯一、満洲国軍航空兵中尉だった朴承煥は釈放後に出世して朝鮮人民軍の航空副司令官になったとも、釈放されずそのまま収容所で獄死したともいわれる。


1期1939年(康徳6年)4月入学(満系90名)、1940年(康徳7年)1月入学(日系172名)春日園生、朴林恒(首席、日本陸士56期編入)、李周一(日本陸士56期編入)、崔昌彦(日本陸士56期編入)、崔昌崙(日本陸士56期編入、韓国陸軍大尉)、金敏奎(日本陸士56期編入)、趙永遠(日本陸士56期編入)、金東河(朝鮮語版)、金永沢(韓国陸軍准将)、尹泰日、方円哲(朝鮮語版)、李奇建(越北、朝鮮人民軍少佐、のち越南し准将)

2期1940年(康徳7年)4月入学、1942年(康徳9年)3月23日卒業。日系240名、満系240名(うち朝鮮系12名)朴正熙(首席、日本陸士57期編入)、李翰林(日本陸士57期編入)、李燮俊(日本陸士57期編入)、金在豊(日本陸士57期編入、越北)、李再起(韓国陸軍大領)、金默(韓国陸軍少将)、安永吉(韓国陸軍少領、死刑)、姜昌善(韓国陸軍大尉、死刑)、李尚鎮(韓国陸軍少領、死刑)、李炳胄(韓国陸軍少領、死刑)

3期1941年(康徳8年)崔周鍾(日本陸士58期編入)、姜泰敏(日本陸士58期編入)

4期1942年(康徳9年)張銀山(首席、韓国陸軍大領、死刑)、芮琯壽(韓国陸軍大領)

5期(満系のみ)1943年(康徳10年)姜文奉(首席、日本陸士59期編入)、黄沢林(日本陸士59期編入、韓国陸軍少領、死刑)、李容述(日本陸士59期編入)、金泰鍾(日本陸士59期編入)

6期1944年(康徳11年)1月入学、日系200名金潤根(日本陸士60期編入)、金世鉉(日本陸士60期編入)、鄭正淳(日本陸士60期編入)、金錫權(日本陸士60期編入)、李遇春(日本陸士60期編入)、金鶴林(日本陸士59期編入、韓国陸軍中尉、死刑)、金基濬(日本陸士60期編入)、朴承煥(越北)、金東勲、陸宏修、新原

7期1944年(康徳11年)12月入学、375名金光植(驪州大学学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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