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國共內戰) 역사속으로




1. 국공내전의 배경과 원인


1) 일본의 패전

1945년 8월 일본군이 항복하면서 8년간에 걸친 전쟁에서 중국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오랜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니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제2차 국공합작을 거쳐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군이 함께 항일전에 참여해 왔기 때문에, 공동의 적이었던 일본의 항복은 곧 두 세력 간의 숙명적인 무력대결을 예상케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일본이 항복하기 전부터 양자 간의 긴장관계가 팽팽했던 데다가 항복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둘러싸고 양측의 갈등이 컸기 때문이었다. 전쟁 종식 이전부터 전후구상에 대한 국·공 양측의 입장 차이가매우 컸으며, 패전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해방구를 접수하는 문제에서부터 양측의 무력 충돌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45년 4~6월 사이, 국민당과 공산당은 각각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전후의 중국에 대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만 17년 만에 옌안[延安]에서 개최된 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은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다. 한편 국민당도 5월에 충칭[重慶]에서 10년 만에 제6차 전당대회를 개최하였는데, 개막식에서 장제스[蔣介石]는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구현을 약속하면서 쑨원 탄생 80주년이 되는 1945년 11월 12일에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훈정기(訓正期)를 종식하고 새로운 헌정기(憲政期)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공산당을 배제한 채 국민당 주도로 정치계획을 실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함으로써, 공산당의 연합정부론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국민당은 공산당의 홍군(紅軍)과 일본군으로부터 해방될 지역을 국민당에 예속시킬 것을 주장하는 한편, 공산당은 국민당정부가 대지주와 금융자본가, 매판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며 항일전쟁에서 소극적이었고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였다고 비난하는 등 양측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윽고 일본군의 패전이 다가오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승전의 명분과 실리를 누가 얼마나 더 많이 차지하느냐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국민당정부는 일본의 패전으로 전승국으로서 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이 되었지만, 공산당에 대한 주도권을 확장하기 위해 무력 대응을 선호하였다.
특히 양측은 중국대륙 전역에 퍼져 있던 130만의 일본군과 80만에 달하는 난징[南京]의 친일 괴뢰정권에 대한 무장해제와 이들이 차지하고 있던 광활한 지역을 누가 접수하느냐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장제스는 해당지역의 일본군 최고사령관에게 국민 당군이 점령지역을 접수할 때까지 치안을 유지하면서 공산당군을 축출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때문에 산시성[山西省], 산둥성[山東省], 장쑤성[江蘇省] 등에서 일본군과 공산군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당시 충칭[重慶]의 국민당군은 미국의 수송지원, 일본주둔군과 난징정부군의 협력을 받아 화북, 화동, 동북, 만주, 서북 지역의 주요 도시와 철도연변을 접수해 나갔다.
이에 공산당측도 국민당정부가 항일전쟁의 결실을 독차지하고 내전을 획책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점령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탈환을 지시하였고, 화북지방과 만주, 동북지역에서 인민해방군에 의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점령지를 접수해 나갔다. 당시 공산당은 만주 지역에서 소련군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아 주로 광대한 농촌지역을 장악해 나갔다.


2)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상과 대립

국·공 양당 사이에서 일본군 및 난징 괴뢰정부 점령지역에 대한 무장해제와 접수를 놓고 치열한 무력투쟁과 내전의 위기가 심화되자, 오랜 전쟁의 참상과 국·공 양당 간 내전 조짐에 불안을 느낀 중국인들은 양당 간 평화협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간의 중일전쟁 기간중국인들이 입은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따라서 중일전쟁 종결 직후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의 참혹한 내전을 피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상에 의해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여기에다가 미국은 물론이고 소련조차도 중일전쟁 기간동안 국민당정부를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였고, 아직 소련과의 냉전이 격화되기 직전인 상황에서 국제적인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국민당정부에 공산당과의 협상을 재개하도록 요구하였다.
당시 국민당군은 중일전쟁 기간 중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중국 서남부의 변경지역으로 물러나 있었고 동북부 일대의 일본군 점령지역과 이 지역들의 배후에서 광범위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공산당군에 비해 전략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공산당과의 협상을 도모하는 동안 공산당군 활동을 저지시키는 한편, 국민당군을 신속하게 전개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마찬가지로 공산당군 역시, 미국이 국민당군을 후원하고 있고, 소련마저 내전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상황에서 국민당군과 정면으로 맞설 만큼 정치, 군사적으로 확고한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민당이 제안하는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29일부터 45일 간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회담을 가졌다. 양측은 “내전을 회피하고 평화적 건국을 지향하며, 정치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할 것” 등에 합의하고, 장래 모든 당파가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10월 10일에 합의 사항을 발표했다고 하여 이를 ‘쌍십(雙十)협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충칭협상이 진행 중인가운데 여전히 화북과 동북지역에서는 공산당군과 국민당군의 무력충돌이 계속 확산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국민당정부에 제한적인 군사지원을 계속하는 한편, 공산당과의 협상에 의한 내전중지와 평화적, 민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독려하였다. 이에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1945년 11월 죠지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을 특사로 파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상을 중재하였다. 이에 대해 소련도 찬성하는 분위기였고, 그해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영·소 외상회담에서 중국의 내전중지와 제3세력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하는 민주적 정부 수립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국내외 정세에 따라 1946년 1월 10일 미국의 마셜 장군, 국민당의 장췬[張群]과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로 구성된 ‘군사 3인위원회’가 상호협의 하에 ‘국공 정전협정(停戰協定)’에 조인하였고, 이날 한 해 전에 합의한바 있는 정치협상 회의를 소집했다. 1월 10일부터 31일까지 개최된 정치협상회의에서 통일정부 수립, 국민대회 개최, 군제(軍制) 개혁, 화평건국강령(和平建國綱領), 군사문제안, 헌법초안 등 ‘5대결의’를 채택하고 가결하였다. 또한 정치협상회의로부터 국공 양군의 감축문제에 대한 협상을 위임받은 ‘군사3인위원회᾿는 1946년 2월 25일 ‘국공 정군협정(整軍協定)’에도 합의하였다. 이처럼 중국대륙에서는 국공 양당과 여러 세력들이 참여하는 평화로운 정치협상과 획기적인 감군계획이 합의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내전이 중단 되는 듯한 희망이 엿보였다.


3) 냉전의 시작

그러나 국공 양당의 합의는 일시적이었고 당초부터 그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양측의 합의는 각 당의 중앙위원회에서 승인된 것도 아니었으며, 국내외 정세는 이러한 합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1946년 2월 소련의 원폭개발과, 3월 영국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의 ‘철의 장막’ 연설로 상징되는 유럽발 냉전의 서막에서, 미국 역시 ‘국공 정군협정’이 체결되던 날 약 1천여 명에 달하는 미군 장교와 병사들로 구성된 군사고문단을 발족하여 국민당군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였고, 6월에는 중국국민당 정부에 대한 군사원조법안을 가결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세계적 냉전의 심화와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공산당군의 반발은 격화되었고, 오히려 국민당정부 내 반공주의 강경세력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이들은 냉전적 구도와 미군이 후원하는 군사적 우세를 과신하며, 정치협상회의에서 이루어진 합의를 무시하고 국민당 일당독재 하의 정권수립에 나섰다. 3월에 개최된 국민당 제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一中全會)에서 정치협상회의의 중요한 결정 가운데 하나였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부결시키고 국민당 중심의 중앙집권적 헌법안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일당독재를 비판하는 진보적 세력과 사회 세력들을 억압하고 진보적 운동가를 암살하는 등의 우익테러를 자행하였다.
이에 대해 공산당이 항의하면서, 만주지방에서 양당 간의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양측은 1946년에 접어들자 예정된 소련군 철수 이후의 만주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4월에 소련군이 철수하자, 공산군이 만주의 농촌지역을 장악하고, 창춘[長春] 등 대도시 몇 군데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국민당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면서 5월 하순에는 만주지역의 대도시를 재점령하였고, 공산당군은 패퇴, 철수를 거듭하였다. 7월부터는 국민당정부가 미국의 지원 하에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공산군의 거점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전면적인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동북아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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