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유엔 연설, 6·25 남침 전쟁을 '내전'이었다고 왜곡 雜文




문 대통령 유엔 연설, 6·25 남침 전쟁을 '내전'이었다고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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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연설은 사실, 헌법, 상식에 반하는 점이 너무 많다.


1. 헌법을 준수해야 할 대통령이 자신의 정부를 촛불혁명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헌법위반의 소지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쿠데타이든 혁명이든 선거 이외의 방식에 의한 정권 교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은 초헌법적 발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혁명이 아닌 대통령 선거로 탄생하였다.

<나는 지난 겨울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이야말로 유엔정신이 빛나는 성취를 이룬 역사의 현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촛불혁명은 협력과 연대의 힘으로 도전에 맞서며 인류가 소망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마 미디어를 통해 목격했던 촛불혁명의 풍경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십만, 수백만의 불빛들, 노래와 춤과 그림이 어우러진 거리 곳곳에서 저마다 자유롭게 발언하고 평등하게 토론하는 사람들, 아이들과 손잡고 집회장을 찾는 부모들의 환한 표정, 집회가 끝난 거리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청년들에게서 느껴지는 긍지, 그 모든 장면들이 바로 민주주의였고, 또 평화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은 민주주의와 헌법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시민들의 집단지성으로 이어진 광장이었습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나 자신도 오직 시민의 한 사람으로 그 광장에 참여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실체인 국민주권의 힘을 증명했고, 폭력보다 평화의 힘이 세상을 더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새 정부는 촛불혁명이 만든 정부입니다. 민주적인 선거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국민들의 주인의식, 참여와 열망이 출범시킨 정부라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그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시작은 늦었지만 세계 민주주의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줬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 그의 6·25 남침 전쟁에 대한 언급은 사실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좌파적이다. 그는 북한정권을 침략자로 규정, 유엔군을 보내 한국을 살려주었던 그 유엔에서 한 번도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남침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국전을 내전으로 인식하는 것은 한완상 류의 좌파적 인사의 왜곡이다. 6·25 남침 전쟁은 내전이 확대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업고 일으킨 침략전쟁이란 사실이 세계적으로 확정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브루스 커밍스 류의 反역사적, 反국가적, 反사실적 전쟁관을 갖고 있다는 게 놀랍다.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이라는 말은 김일성의 전쟁범죄 책임을 덮기 위하여 냉전 구조에 책임을 轉嫁한 용서할 수 없는 억지이다.

<나는 전쟁 중에 피난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온전한 삶을 빼앗겼습니다. 내 아버지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피난한다고만 생각했던 내 아버지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자신이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인 이산가족입니다.

그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은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64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안정한 정전체제와 동북아의 마지막 냉전 질서로 남아 있습니다.>

3.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이나 인위적인 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헌법위반이다.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인위적 자유통일을 명령한 것이다.

4. <나는 평창이 또 하나의 촛불이 되기를 염원합니다.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들었던 촛불처럼 평화의 위기 앞에서 평창이 평화의 빛을 밝히는 촛불이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유엔이 촛불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유엔이 촛불 되면 어떻게 되나? 불타 없어지란 뜻인가? 비유도 분위기를 봐서 해야 할 것 아닌가? 9·11 테러로 폭파된 세계무역회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유엔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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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교육 교과서(고교 한국사 2013년 8월 검인정 판): <남한과 북한의 대립은 38도선 부근에서의 잦은 무력 충돌로 나타났다. 그러던중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선전 포고도 없이 전면적 남침을 감행하면서(후략)>

문제제기: '무력 충돌'이란 표현이 문제이다. 38도선을 둘러싼 무력 충돌은 북한군의 도발에 대한 한국군의 방어전 성격이었다(아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 그렇다면 '잦은 북한군의 도발'이라고 적어야지 '잦은 무력 충돌'이라고 하여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흐려선 안 된다. 비상교육 교과서는 '그러던중'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여 학생들에게 6.25 남침이 잦은 무력 충돌의 연장선에 있는 자연스러운 사건인 것처럼 그릇된 역사를 가르칠 위험이 있다.
좌편향 교과서는 북한이 불리한 경우엔 '무력 충돌' 식으로 책임 소재를 흐리는 기술을 한다.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이라 하지 않고 '천안함 사건'이니 '천안함 침몰'이라고만 적어 누가 범인인지를 밝히지 않는 것과 비슷한 수법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북한의 38도선 도발과 국군의 대응은?


무력충돌은 1 9 4 9년 3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격화됐다. 그 대부분은 경비대간의 소규모 충돌로 발생한 것이었지만, 어떤 경우는 보병대대 규모로 확대된 적도 있었다. 충돌격화의 원인은 북한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1 9 4 7년 7월부터 소련군으로부터3 8도선 경비임무를 인수해 북한‘3 8경비대’가 경비를 맡아왔고, 1949=년 초부터는 그 규모를 3개 여단으로 증편해 전술상의 요지를 장악한 후 강력한 진지를 구축해놓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진행된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의 도발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았다.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해온 한국정부는 주한 미국대사 무초로부터 한국군의 전력증강을 위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약속받고 철군에 동의했다.

그러나 4월 1 8일 뉴욕타임즈 등 외신을 통해 철군예정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사회여론은 비등했고, 남침 위기감이 사회전반으로 확산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위기의식을 가라앉히기 위해 북한이 남침해오면 강경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단호한 의지를 내보였다. 정부도 국민이 동요하지 않도록 여론을 진정시킴과 동시에 한반도 철군 후 힘의 불균형을 메워줄 안전보장의 확약이라는 측면에서 미국 행정부에 안보공약을 요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남침위기설과 대북 강경대응 입장이 집중적으로 표명되던 1 9 4 9년 5월 초, 개성, 옹진, 춘천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전투가 발발했다. 특히 개성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심각한 위기상황이라고 평가될 만큼 격렬했다. 이 전투는 개성 북서쪽의 2 9 2고지에서 시작됐다. 발단은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이 북한군의 진지 앞에 진지를 구축하자 북한군이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은 국군 제1사단 제1 1연대 예하 제2대대는 2 9 2고지뿐만 아니라 그 남쪽의 유엔고지, 비둘기고지 마저 빼앗겼다. 이로 인해 개성이 위협받게 되자 제1 1연대장은 즉시 문산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중인 제1대대 제3중대와 제4중대를 제2대대에 증원함과 동시에 황해도 연안방면으로 행군훈련을 나간 하사관교육대를 개성으로 복귀시켜 반격할 태세를 갖췄다.

다음날 특공대로 자원한 용사들이 1 2 : 0 0시 포병의 지원사격 하에 비둘기고지로 돌진했지만, 북한군의 각 토치카에서 뿜어져 나온 기관총사격 때문에 목표지점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 특공대원들은 오후 1 4 : 0 0시 지정된 북한군의 특화점으로 박격포탄을 들고 돌입하여 장렬하게 자폭함으로써 마침내 목표물들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후속 지원된 하사관교육대 병력이 비둘기고지를 탈환했으며, 이내 2 9 2고지도 무난히 탈환했다.

이를 계기로 개성부근 전투는 북한이 다시 옹진지역을 공격함으로써 크게 확대돼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 벌어졌다. 그러한 상황은 소규모 전투와 포격전을 반복하면서 6·2 5전쟁이 발발하기전까지 이어졌다.

알아봅시다! 6·2 5전쟁사(제1권 배경과 원인)

[ 2017-09-22, 00:28 ]

덧글

  • badoc 2018/12/29 12:50 # 답글


    6.25 전쟁 바로 알기 ① 남침이냐, 북침이냐



    김갑수 | 2017-06-12 12:48:4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남침이냐, 북침이냐
    6.25 전쟁 바로 알기 - ①


    6월 25일이 가까워지고 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나는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자랐다. 미국에서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 The Forgotten War ’이라고 불린다. 한국에서도 노래와 달리 6.25는 잊혀져 가고 있다. 노래는 6.25를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이라고 규정했다. 6.25의 실상에 대해 바로 알아보자

    2008년 노무현은 10·4선언 기념식 연설에서, “6·25는 남침이었고 한국전쟁은 ‘내전’이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것은 6·25와 한국전쟁을 구별해서 파악한 것이다. 노무현이 말한 ‘한국전쟁 내전론’은 진보학계에서 취하고 있는 유력한 관점 중 하나이다. 그러나 6.25는 결코 내전이 아니다. 그리고 ‘6·25 남침설’은 이제는 보수건 진보건 부정할 수 없는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사실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따지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남침’을 강조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태도이다. 반면 ‘남침’에 맞서 아직도 ‘북침’을 주장하는 좌파는 말 그대로 맹동이고 ‘구닥다리’일 따름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김일성의 남침을 ‘죄악시’한다. 그런 나머지 김일성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조차 꺼려한다. 꺼려하기 때문에 잘 알려 하지도 않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에 대해 거의 모르는 채로 있다.

    6·25 남침을 비난하려면 최소한도 왜 그런 일이 빚어졌는지 전후의 인과적 팩트는 알고서 해야 하지 않을까? 김일성이건 이승만이건 폭력통일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김일성은 강했고 이승만은 강한 척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38선에서 무수한 도발을 감행했다. 동시에 단지 반공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대량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전쟁은 이럴 때에 일어나는 법이다. 약한 국가가 강한 국가를 향해 허세와 폭력만을 일삼을 때, 약한 국가는 어김없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949년 4월, 마오의 인민해방군이 장제스의 국민연합군을 남으로 밀어내면서 양자강을 건너는 순간은 중국 인민혁명의 클라이맥스였다. 이때 동북에서는 중국과 조선 연합군의 성격을 띤 동북민주연군이 주력군이었다.

    마오의 인민해방군이 양자강을 건너려 하자 뜻밖에도 스탈린이 제동을 걸어왔다. 스탈린은 미국과 국민군과 인민해방군 3자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미국 편을 들었다. 결국 스탈린은 중국을 분단시키려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이때 마오는 무서운 분노를 표출했다.

    “스탈린, 왕파탄(자라 좆만 한 새끼)! 제 놈이 양자강을 조선의 38선일 줄 아는구나.”

    마오의 인민해방군은 너비 500km의 도강전선을 형성하여 파죽지세로 양자강을 건넜고, 1949년 4월 2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으며, 5월 27일에는 대륙의 최대 도시 상하이까지 쓸어 버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 상공을 오성홍기로 물들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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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과 김일성 2018/12/29 12:53 # 삭제


    6.25 전쟁 바로 알기 ② 마오와 스탈린 그리고 김일성

    김갑수 | 2017-06-13 14:52:1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마오와 스탈린 그리고 김일성
    6.25 전쟁 바로 알기 - ②

    “중국 오성홍기의 별들에는 조선인의 피가 배어 있다.”

    이것은 27년 동안 중국 총리 직(외교부장 겸직)을 견지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남긴 말이다. 이는 결코 과장이거나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조선인 군대는 중국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위기마다, 고비마다 중국군을 결정적으로 도왔다. 나는 만약 조선인의 가열 찬 지원이 없었더라면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은 좌절되었거나 상당 기간 늦추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김일성은 중국 국공내전의 연장선으로 ‘조국통일전쟁’을 수행한 것이었으며,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남침’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말대로 김일성은 실패했다. 김일성은 실패한 이유로 미군의 개입을 첫째로 들었다.

    그러나 마오는 다른 이유를 들었다. 마오는 미군의 개입을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펑더화이의 지휘로 압록강을 넘어온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국 폭격기의 위력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그것은 일찍이 대장정에서도 항일전에도 국공내전에서도 겪어 본 적이 없는 위력이었다. 마오의 아들 마오안닝이 미군기 B-26의 네이팜탄에 희생된 것은 압록강을 건너온 지 불과 34일 만의 참사였다.

    공군력은 공군력으로만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군의 파병을 부추기면서 했던 약속인 공군력 지원을 스스로 식언으로 만듦으로써 마오의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북의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6·25 사흘 만인 6월 28일이었다. 김일성이 ‘조국통일’의 무지개를 그리고 있을 때, 북경의 마오는 비서 스저에게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김일성은 대단히 용감한 지도자’라고 칭찬만 해오던 마오가,

    “김일성은 전략과 책략이 틀려먹었다. 성질이 급하다 보니 출병 시기도 잘못 잡았다. 기반이 없는 남쪽으로 더 내려갈까 봐 눈을 붙일 수가 없다. 인천 쪽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제주도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서쪽으로 상륙하면 조선군은 허리가 잘린다. 그러면 아주 위험해진다.”

    쉬었다가 공격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마오의 뜻이 전달되었지만 김일성은 끝내 듣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휘와 관련된다고 본다. 스탈린이 노렸던 것은 마오를 미국과의 전쟁에 몰아넣는 일이었다. 마오는 조선 인민군이 남으로 계속 내려가자 말없이 참전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이 붕괴되자 다수의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패배’로 규정하면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웃기는 일 아닌가?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제국주의 국가였을 뿐이다. 러일전쟁 때 겉으로는 전쟁하는 척하면서 이면에서 미국과 야합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독식하도록 협조한 것은 러시아였다. 1921년 레닌 시절의 소련군은 자유시 참변으로 조선 독립군들을 몰살시켰다.

    6·25 직후 소련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함으로써 미국 참전에 명분을 실어 주었다. 제국주의의 이면 역사를 모르는 진보주의자들은 소련을 과대평가한다. 나는 이것을 강자선호의 유럽사대주의와 일정 부분 관련된다고 본다.

    반면에 아직도 진보주의자들은 중국을 실제보다 더 나쁘게 본다. 하지만 중국은 대국주의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제국주의는 아니다. 오늘날 중국 지도부가 다소 변질된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에서 마오는 5천 년 역사 최상의 인물로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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