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대 칼럼> 동포사회의 5대 비극 雜文



<한상대 칼럼> 동포사회의 5대 비극


한호일보 | 승인 2011.03.04 10:13



1860년경 연해주 이주로 시작된 우리나라 해외동포는 규모로는 중국, 이태리, 이스라엘, 인도 등에 이어 세계 5위, 인구 대비비율로는 이스라엘, 이태리에 이어 3위에 해당된다.
해외동포들은 다음과 같은 비극을 겪으며 살아남아 현재 8 백만명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1.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사건: 독립군이 일본군을 공격한대 대한 보복으로 1920년 4월에 신한촌이 일본군에게 습격을 당한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유격대가 일본군을 습격할 때 한인들이 같이 유격전을 전개한데 대한 보복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여 그 이튿날 아침에 큰 마당과 큰 거리에 시체가 산 같이 쌓이고, 온전한 집이 하나도 없었다.
또 한민학교를 벤진을 부어 불지르고 체포한 한인 유지와 청년을 다 처형한다.

2. 1920년 경신년 대참안: 1920년 9월 청산리전투에서 2천 5백명의 독립군은 5만명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3천 3백명이나 사살한다.
보복으로 일본군이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이 "대토벌" 에서 훈춘, 연길, 화룡, 왕청 4개 현에서만 한인 3,500여명을 살해하고 5,058명을 체포하였으며 가옥 2,500여 채, 사립학교 30여 개소, 양곡 4만 5,000여 섬을 불태웠다.
특히 "해란강대참안"은 일본군이 해란구에 대해 94차의 토벌을 감행하여 항일군중 1,700여명을 살해하였다.

3. 1923년 관동대지진: 1923.9.1 오전 11시58분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동(關東)지방에 7.8도의 대지진이 일어난다.
이 지진은 도쿄의 60%, 요코하마의 80%를 파괴했다.
사망자 9만9,331명, 가옥 전파(全破) 12만 8천 266동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 다음날 야마모토 내각은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내각은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집어넣었다!' '조선인의 배후에는 사회주의자가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이것을 구실로 대대적인 조선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한 조선인의 숫자는 조선인 측에서는 3만 명, 일본측에서는 6천 여명으로 집계 되었다.

4. 1937년 강제이주 사건: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하자 당시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지도자 2,500명을 먼저 사살한 후 18만여 명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킨다.
9월에 시작한 강제이주는 한 달이 넘게 계속되었고 시베리아 횡단 열악한 열차 속에서 한인들이 죽어 갔으며 하차한 중앙아시아의 반 사막지대에서 겨울을 나면서 한인들의 5분의 1이 죽어갔다.
한인 촌에 일본 스파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게 제일 큰 이유였다.

5. 1992년 LA 폭동사건: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은 인종차별과 빈부격차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로드니 킹 구타사건과 백인경관들에 대한 무죄평결이 그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불똥은 한인촌으로 튀었다.
흑인과 히스패닉 폭도는 사흘 동안 한인타운을 유린했다.
세 집에 한 집 꼴로 불이 나 상점 2,800곳이 파괴되고 4억 달러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언론은 노골적으로 ‘한-흑(韓黑) 갈등’을 부추겼다.
흑인밀집지역의 상권을 장악한 한인들은 미움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당시 LA폭동은 언젠가는 터질 시한폭탄이었다.

한호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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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badoc 2018/12/29 18:30 # 답글

    한상대 교수의 고려인 이주사 4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한호일보 | 승인 2012.04.05 18:12

    인간 속성의 한계인가?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독립군 사이에 주도권 쟁탈전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비극을 겪는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 27일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에서 붉은군대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독립군 세력은 사실상 전부 괴멸되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고 약 1800여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3천명의 희생자를 낸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였다.
    1920년 당시 러시아는 내전 중이어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붉은군대와 반혁명파를 중심으로 한 하얀군대가 대립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하얀군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 지원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출병했고 하얀군대를 지원하는 속셈은 반일 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독립군을 소탕하고자 했다.
    이에 독립군은 적군파에 가담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신한촌의 민간인을 상대로 대대적인 보복작전을 감행하자 가족을 잃은 독립군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 밀산에서 독립군을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북로정서군은 서일, 김좌진, 대한독립단은 이청천, 대한독립군은 홍범도가 지휘하고 있었다.
    새로 편성된 대한독립군단의 총재에는 서일, 부총재는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이 추대되었다.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선출되고, 여단장에 이청천(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 조동식, 오광선이 선임되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 여명이었다.
    밀산에서 겨울을 난 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만주일대에서 활동 중이던 문창범, 한창해 등의 도움을 받아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에 집결하였다.
    당시 간도에는 서일의 군정서, 홍범도의 독립군, 최진동의 총군부, 안무의 국민회군이 있었으며, 러시아 지역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의 이항군과 고명수의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이 있었다.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모든 독립군들은 자유시에 집결했다.
    자유시 집결은 분산돼 있는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조직 아래 대일항전이 목적이었다.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중 자유시로 들어간 이청천 부대는 홍범도의 소개로 소련 적계군 한인부대장인 박일리아 연대장을 알게 되고, 박일리아는 소련 교관을 한국독립군부대에 배치하여 전술법을 교육하는 등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가 통수권을 놓고 권력다툼을 벌인다.
    이르쿠츠파는 대한국민회의를 지지했고, 상해파는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했다.
    상해파를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러시아의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협조를 청했다.
    당시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와 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부대와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냈다 동시에 상해파 군대를 사할린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 독립군을 두도록 했다.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한다.
    한인부는 다시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르쿠츠파는 끝까지 불응하다가 상해파에 의해 장교들이 체포되고, 무기는 압수당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의 승리로 돌아가자 이르쿠츠크파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코민티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설득했다.
    동양비서부는 임시 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시월린, 부사령관은 오하묵을 임명했다.
    박일리아는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한다.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윌린은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지만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해 계속 반항했다.
    그러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한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의용대에 접근하여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의용대는 불응했고, 자유시수비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의용대는 전사자와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1년전 신한촌에서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독립군은 아까운 목숨을 이렇게 잃어 버린다.
    조국을 찾겠노라 말달리던 독립군 중 약 3천명은 이렇게 허망한 최후를 맞는다.
    교전 후 대한독립군은 붉은군대 소속으로 편입되어 이루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이 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두달후 밀산에서 자결한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독립군은 자유시로 가지 않고 그냥 만주에 잠복하고 있었다.
    지청천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고 김좌진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여 만주로 돌아왔다.
    독립군사상 최대비극인 이사건을 일부 학자들은 LA폭동 대신 해외동포 5대 비극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한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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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로군정서 서일 2018/12/29 18:46 # 삭제

    서일..

    국경 지대인 함경북도 경원군 출생이다. 1902년 경성군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인 1911년 국경을 넘어 만주로 망명했다.

    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重匡團)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해 단장에 취임했다. 그는 1911년 경에 창시자 나철을 만나 감화를 받은 뒤 이듬해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9년 김좌진 등 39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1]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광단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하였고, 무장 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설치하여 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한 무장 항쟁을 기도하였다.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대한군정부로 통합된 뒤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는데, 흔히 '북로군정서'로 불리는 단체이다. 이범석과 김좌진이 북로군정서 소속이었으며, 서일은 총재를 맡았다. [위키백과]

    1921년에는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가, 그해 6월 28일 자유시 참변(일명 흑하사변)이 일어나고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후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결했다.
  • 스보보드니/自由市 2018/12/30 07:32 # 삭제 답글

    러시아 제국기부터 적백내전에서 적군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알렉세예프스크Алексеевское'라고 불렸다. 스보보드니라는 이름은 공산주의자인 적군이 도시를 점령하고 바꾼 것으로 러시아어로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 구한말 한국에서는 이 이름을 의역해 자유시라고 불렀다. 한편 이 적군은 한국독립운동 사상 최악의 악몽 자유시 참변을 일으킨다. 한국인들이 이 작은 도시 이름을 들어봤다면 분명 자유시 참변 때문일 것이다.

    Svobodny is a town in Amur Oblast, Russia, located on the right bank of the Zeya River, 167 kilometers north of Blagoveshchensk, the administrative center of the oblast. Population: 58,778; 63,889; 80,006.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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