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명함 雜文



마지막 명함

이른 점심식사를 끝내고 동네 한 바퀴 산책하러 나섰다. 걷기 운동 겸 자주 다녔는데 최근 들어서는 무지막지한 미세 먼지 덕분에 마음 놓고 다니지를 못한다. 그래도 큰마음 먹고 황사마스크 로 얼굴을 가린 채 나가 보았다. 경칩이 지나서인지 별로 춥지도 않고, 먼지만 덜 하면 참 상쾌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역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낯익은 인쇄소 간판이 눈에 들어 왔고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지내던 사장 얼굴도 볼 겸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사장은 없고 부인과 직원들이 마침 식사 중이었다. 사실 이곳 사장은 경제적으로 제법 성공한 지역 후배로서 로타리클럽의 회장도 역임하였고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봉사활동도 꾸준히 하였으며 참으로 무난한 호인이었는데, 작년에 별안간 뇌졸중이 와서 고통을 겪었고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지만 그래도 사람 만나는 걸 자제하며 주로 집에서 소일한다고 하였다.

이왕 간 김에 새 명함을 주문했다. 그간 사용했던 명함의 직함은 원장, 교수, 회장이 차지하였는데 이제는 다 내려놓고 보니 남아 있는 유일한 직함이 ‘원장’이다. 교수나 회장은 이미 전직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음에도 가지고 있는 명함에는 아직도 ‘회장’이 적혀 있기에 사인펜으로 ‘회장’을 지워서 사용하는데 마치 내 얼굴이 좀 지저분해 보이는 느낌이며 그나마 얼마 남은 것 같지도 않아서 이래저래 새 명함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과거 젊은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명함을 주고받을 기회가 확 줄어버렸기에 300매만 인쇄하여도 족히 5년은 사용할 듯싶다. 고희가 넘어서 천직을 버리고 새로운 사업을 할 계획도 전무하거니와 다른 직책을 맡을 기회도 희박하다 보니 오늘 주문한 명함이 마치 내 인생의 마지막 명함 같은 생각이 들어 혼자 쓴 웃음을 짓게 된다.

문득 오래된 명함첩을 꺼내보니 참 새롭다. 그래도 그 많은 명함들을 주고받으면서 물론, 초면의 의례이기도 하지만 악수를 하였든 목례를 하였든 한 점 인연이 되어 어느 누구에게는 내가 기억되기도 하고 나 또한 일부나마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불현 듯 명함첩에 있는 인물들은 지금 어찌 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수십 년 된 명함들을 들여다보니 지역번호도 변했고 두 자리 국번도 눈에 띄며, 012와 015로 시작되는 삐삐 번호도 있다. 뭔 놈의 이동통신은 이렇게 많은지, 011, 013, 016, 017, 018, 019, 아이고... 013은 무전기 겸용 파워텔 전화라고 한다. 명함도 오래 간직하였더니 골동품인양 참 신기하다. 모양도 글씨체도 내용까지 각양각색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명함을 사용한 인물은 구한말 최초의 미국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이라는 설도 있고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미국방문 사절단 시절에 사용하였다고도 하는데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시절에는 참 희귀하였을 듯하다. 요즈음은 초등학생도 본인의 캐릭터와 전화번호를 넣은 명함을 만들어 어린이회장 선거 등에서 사용한다고 하니 세상 참 많이 변했음을 인정해야겠다.
아주 오래 전에 내 명함을 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들의 서랍 귀퉁이나 명함첩에 내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면 참으로 감사할 일이며 진즉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한들 서운할 이유도 없다. 나 역시 별 의미 없던 명함들은 소중히 간직하지 못 하였고 더 이상 내게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새로 찍을 내 마지막 명함은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주고 그들에게서 받은 명함도 함부로 버리지 말고 원본 그대로 복사하여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겠다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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